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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SCO 이야기/화폐와 행복(사보)

(문학 속의 돈 이야기)돈으로 인한 죄, 그 고해성사

by 한국조폐공사 2015. 5. 14.




도스토예프스키의 「프로하르친 씨」의 주인공은 돈 문제 때문에 애면글면 살다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다. 세묜 이바노비치 프로하르친 씨는 매우 낮은 관등에 가난한 하숙생이었다. “극도의 절약과 인색함”을 보였던 그는 이웃에게는 “사교적이진 않지만 착하고 온순한 사람”으로 비쳐졌다. “아첨꾼은 아닌 것이 분명하고, 만약 그가 고통을 겪게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니라 그에게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주변에서는 생각했다. 그는 가난에 치여 홀로 고립된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광기에 걸려 마침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는 인간다운 생활을 하지 못한 채 살다 죽었다.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침구 등에 숨겨둔 결코 적지 않은 돈을 발견한다. 그는 너무나도 가난했기 때문에 그 가난에 짓눌려 쓸 수 있는 돈도 제대로 쓰지못하고 지키려고만 발버둥 치다가 죽어간 것이다.


과연 어느 순간까지 그 돈을 지키려고 했던 것일까.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가난하고 불우한 수전노로 전락하게 한 것일까. 물론 절대적인 가난이 심층의 문제였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타인과의 허심탄회한 소통을 거부한 채 고립적으로 자신의 가난한 고통을 극대화했던 프로하르친 씨의 드라마틱한 행태에 대해 지적한다. 이와 관련하여 작중 오케아노프의 논평은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다른 모든 사람도 힘들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알았더라면 머리가 돌지도 않았을 테고, 저런 못난 짓을 하지 않고 그럭저럭 지냈을 텐데……” 가련한 프로하르친 씨는 오로지 자기 안의 고통으로 침몰하기만 했다. 돈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돈의 노예로 전락한 그의 처지가 참으로 안타깝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두루 알다시피 저물어가는 황혼의 잿빛 러시아의 하늘 아래서 가슴을 짓이기며 살았던 작가다. 영혼의 상처를 휘감고 도는 어둠의 정체를 그는 언제나 직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응시하기에 세상은 마치 정신병원과도 같은 콤플레스의 오믈렛이었고, 그 콤플렉스의 어느 지점에 돈의 문제가 매우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었다. 널리 알려진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만 하더라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가난 탓으로 대학 공부를 중도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 청년은, 더럽고 비좁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기묘한 ‘범인-비범인’이론을 구안한다. 통상의 법률을 따르는 대중이 범인이라면, 비범인은 법률을 만들게끔 선택된 소수자로서, 현실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서는 현실적 장애물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당당한 권리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비범인이다. 무가치한 범인인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일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비범인인 자신의 앞날을 빛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백해무익한 범인한 사람쯤은 희생시켜도 괜찮다고 여긴다. 이에 돈을 빌려주고 비싼 이자나 챙겨서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전혀 무가치한 고리대금업자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까지 살해하고 만다. 바퀴벌레의 생명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한 간악한 인간을 살해하고, 그녀의 돈을 이용하여 전 인류에 대한 봉사에 자기 삶을 바칠 작정이었다. 하나의 사소한 범죄는 수천의 적선(積善)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 터이며, 또한 단 하나의 생명에 의해 수천의 목숨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것이 자연법칙을 따르는 길이라 믿었던 터였다.


그러니까 라스콜리니코프는 논리적인 관념의 세계 안에서 독단적으로 응징한 셈이다. 이 관념적 심판이 곧 현실적 죄로 이어지지만,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돈의 현실과 그에 따른 인간 삶의 비참함에 대한 폭로와 비판을 함축한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는 죽인 노파로부터 훔친 돈을 유용하게 쓰기는커녕 어딘가에 버리고 자신의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만 받는다. 그럼에도 판사와 사상적 논쟁가지 불사하면서 좀처럼 자수하려 하지 않는다. 범인인 판사에 굴복한다면 비범인으로 자기 사상의 파탄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로 내적인 동요가 일어난다. 자기의 욕망 충족을 위해 도덕을 무시하는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점차로 스스로의 감옥에 갇힌 고독자의 형상이 되어간다.


그러던 중 주정뱅이 말레라도프가 마차에 치여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그의 딸 소냐와 사귀게 된다. 그녀는 정신착란증을 앓고 있는 계모와 어린 동생들을 위해 몸을 팔고 있는 창녀였다. 촛불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창녀는 ‘나자로의 부활’을 읽어주고 살인자는 그것을 듣는다. 소냐에게서 구원의 갈망을 느낀 라스콜리니코프는 끝내 간접적인 고백을 한 다음 방바닥에 엎드려 그녀의 발에 키스를 한다.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백을 들은 소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은 넓지만 지금의 당신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어요. 지금 당장 네거리로 나가 당신이 더럽힌 대지에 입 맞추세요. 그리고 큰 소리로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들리도록 ‘나는 살인자올시다!’하고 외치세요. 그리하면 아직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구해 주실 거예요.” 소냐의 말대로 라스콜리니코프는 광장의 대지의 더러운 흙에 입맞추고 경찰서에 자수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구원에로 이르기 위한 라스콜리니코프의 진정한 회개를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소냐의 감화가 필요했다. 시베리아 유형지를 따라온 소냐가 계속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과 진실에 결국 감화된 라스콜리니코프는 마침내 자기 사상의 패배를 수긍하고 자기 죄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문제적인 페테르스부르크의 뒷골목을 무대로 하여 써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체제 이행기의 현장이던 당시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는 파리와 런던 다음 가는 제3의 문제적 도시였다. 「죄와 벌」이 쓰이던 1865년은 농노해방 이후 러시아를 휩쓸었던 경제공황이 극에 달했던 무렵이었다. 거리는 삶의 근거를 박탈당한 채 뿌리 뽑힌 주변인들로 하여 무척 신산스러웠다. 알코올 중독·매춘·폐결핵·실업 등 당시 페테르스 부르크에 만연하던 온갖 사회경제적 병리들이 이 작품의 독특한 공간적 배경을 이루고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은 여러모로 당연하다.


게다가 이 시절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최악의 경제적 궁핍기를 보내야 했다. 자신이 경영하던 잡지의 도산 등으로 끼니조차 이을 수 없는 참상이었다. 실제로 소설 「죄와 벌」은 《모스크바 시보》에 채무의 저당으로 ‘팔려야’ 했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작품을 집필하는 기간 내내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위의 여러 사람들에게 돈을 꾸어 달라는 애절한 사연을 담은 편지를 수시로 보내야 했으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채권자들에게 빚의 변제를 연기해 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보내야 했다고 한다. 작가가 처했던 시대 환경이나 작가 자신의 경제적 처지의 측면에서도 이 작품의 숨은 의미의 많을 것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런 경제 현실에서 그는 무수한 번민에 휩싸인다. 그 번민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두 형태의 극단적인 인간상을 창조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나는 내 의지대로 살고 싶다’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사랑 없는 타락한 인성의 전형이라면, 그 대척점에 사랑과 구원의 대모신(代母神)격인 소냐가 있다. 앞서 본대로 라스콜리니코프가 죄와 벌로부터 벗어나는 계기는 소냐의 영혼에 의해 마련된다. 소냐는 가족들을 위해 몸을 팔아 돈을 마련해야 했던 여성이지만, 순결한 신성을 추구한 운명적 인물로 우리 가슴에 와 닿는다.


소냐에 의해 라스콜리니코프가 구원에의 길로 인도되는 모습에서 우리는 문학으로 된 ‘나자로의 부활’을 예감한다. 그런 면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죄로 얼룩진, 그래서 벌 받고 있는 참담한 인성(人性)의 고해성사이면서, 참다운 인간 세계로 거듭나기 위해 신성(神性)의 메시아를 간절히 부르고 있는 대서사시다. 돈과 연계된 운명의 비극을 통해 영혼의 갱신을 알게 해주는 대서사시다.



출처 화폐와 행복 5+6, 『문학 속의 돈 이야기 3

글 우찬제 문학비평가,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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