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바닷물 같아 마실수록 목마르다”
쇼펜하우어와 코스톨라니와 돈
고두현 / 시인
시인.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유배시첩-남해 가는 길’ 당선
으로 등단했다. 잘 익은 운율과 동양적 정조, 달관된 화법을 통해 서정시
특유의 가락과 정서를 보여 줌으로써 전통 시의 품격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문화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시집 『달의 뒷면을 보다』,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를 비롯해
시 산문집 『시 읽는 CEO-처음 시작하는 이에게』, 『옛 시 읽는 CEO-순간에서 영원을 보다』,
『마흔에 읽는 시』, 『마음필사』, 『동주필사』, 『사랑, 시를 쓰다』 등을 냈다.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등을 수상했다.
쇼펜하우어는 부유한 철학자였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돈 걱정 없이 평생 연구하고 글 쓰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잘나가는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작가였다. 본명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아르투어’는 영어로 ‘아서’(Arthur)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업가로 키우려고 당시 상공업이 발달한 영국친화적인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이 덕분에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이름은 금방 익숙해졌다.
그의 사상은 미국의 전원파 문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나 랠프 월도 에머슨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와 에밀 졸라, 독일 작가 토마스 만과 헤르만 헤세도 그를 존경했다. 러시아의 톨스토이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그의 이름을 등장시켰다. 영국 작가 토마스 하디의 《테스》에도 그의 이름이 나온다.
이렇듯 많은 문인과 사상가들에게 영감을 줬지만, 정작 그의 일상은 엽기적인 사건들로 점철됐다. 대선배 철학자 헤겔을 질투해 온갖 해프닝을 벌이고, 여성을 미워해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다. 그의 친구는 개 한 마리뿐이었다.
돈을 쓰는 데도 인색했다. 그는 “돈 벌 재능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쓰는 데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돈은 그에게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가는 방편이었다. 소유하기를 원할수록 더 많이 갖고 싶어지는 게 돈이므로 그것을 삶의 행복으로 바꿀 줄 모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단한 욕망에 쫓겨 만족하지 못하는 생은 고통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모든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 이상의 부는 행복감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많은 재산을 유지하느라 쓸데없는 걱정을 하므로 우리의 행복감이 방해받는다. (중략)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적 교양을 갖추기보다는 부를 얻기 위해 수천 배 더 노력한다.”
돈에 관한 그의 명언도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돈은 인간의 추상적인 행복이다. 따라서 더 이상 구체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즐길 능력이 없는 자는 자신의 마음을 온통 돈에 쏟게 된다.” “우리는 갖고 있는 것에 좀처럼 감사하지 않고 언제나 없는 것만 생각한다.”
그의 명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걸 꼽으라면 “돈은 바닷물과 같다.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더 마르다”는 구절을 들고 싶다. 바로 이 문장에서 불현 듯 아이디어를 얻어 ‘돈’이라는 시를 썼으니, 내게는 더욱 특별하고 의미 있는 문구다. (새 연재 ‘문학 산책’을 시작하면서 신고식 겸해 돈과 관련한 자작시 한 편을 준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돈
그것은 바닷물 같아
먹으면 먹을수록
더 목마르다고
이백 년 전,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한 세기가 지났다.
이십세기의 마지막 가을
앙드레 코스톨라니가
93세로 세상을 뜨며 말했다.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
그리고 오늘
광화문 네거리에서
삼팔육 친구를 만났다.
한 잔 가볍게
목을 축인 그가
아주 쿨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주머니가 가벼우니
좆도 마음이 무겁군!
고두현,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중
이 시는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휘청거리던 1999년 가을에 썼다. 그해 추석을 열흘 정도 앞둔 9월 14일, 유럽 제일의 투자자로 추앙받던 앙드레 코스톨라니가 세상을 떠났다. 93세로 타계한 그의 ‘인생 황금률’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대하라’였다. 이는 같은 제목의 책으로 출간돼 독일 최장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 서문만 남겨 놓고 탈고한 책이어서 무게감이 더했다.
그는 기업가치와 주식가치의 원리를 재미있는 은유로 표현했다. 그 유명한 ‘코스톨라니의 개’도 그 중의 하나다.
‘한 남자가 개와 산책한다. 보통 개들이 그렇듯 주인보다 앞서 달려가다가 주인을 돌아본다. 다시 달려가다 주인보다 너무 많이 달려왔다 싶으면 돌아간다. 그렇게 둘은 산책하며 같은 목표지점에 도달한다. 주인이 1킬로미터를 걷는 사이 개는 쉬었다 달리기를 반복하며 4킬로미터를 움직인다. 여기서 주인은 기업가치, 개는 주식가치다.’
그는 주식투자로 35세에 부자가 됐지만 돈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을 벌 때는 뜨겁게 사랑해야 하지만, 그 주체로서 돈을 다룰 때는 냉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검약’(thrift)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번영하다’(thrive)라는 사실과 상통한다. 부자가 되려면 객관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사고를 갖는 게 중요하다는 원리와도 맞닿아 있다. 영국 사상가 존 러스킨의 말처럼 “나쁜 날씨는 없고, 단지 종류가 다른 날씨가 있을 뿐”이다.
물론 돈을 빨아들이기만 하고 내보낼 줄 모르는 수전노로 전락해서도 안 될 것이다. 돈이 행복을 방해하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한다.
우리 삶이 검약과 번영의 텃밭 위에서 정신적 안락의 경지까지 가 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미 200년 전 쇼펜하우어와 100년 전 앙드레 코스톨라니가 먼저 깨닫고 알려줬으니……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우리는 쇼펜하우어처럼 풍부한 유산을 물려받지도 못하고 코스톨라니처럼 돈을 뜨겁게 사랑하지도 못한 채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 시 ‘돈’을 경향신문에 소개한 정끝별 시인은 나날이 힘겨워지는 밥벌이와 가장의 의무에 짓눌린 ‘삼팔육’들의 고뇌를 일깨우면서 ‘목을 축일수록 목마르고, 사랑할수록 마음만 무거워지는’ 우리의 삶을 위로했다. 하긴 팍팍한 일상에서 늘어나는 건 돈이 아니라 육두문자일 뿐이니 어쩌랴. 그래도 우리가 현인들의 가르침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일터로 나가는 것은 아직 다 채우지 못한 희망의 주머니가 그만큼 남아 있기 때문이다.
출처 : 화폐와 행복 2017 7+8 『문학산책』
글 : 고두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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