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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SCO 이야기/화폐와 행복(사보)

2015, 3+4 "문학 속의 돈 이야기2"

by 한국조폐공사 2015. 3. 13.




“아아, 돈, 돈, 이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슬픈 일들이 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일찍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했던 말인데, 이 말은 19세기는 물론, 20세기 내내, 그리고 지금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통탄이 아닐까 싶다. 실로 돈 때문에 세계 도처에서 하고많은 비극적 사연들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S. 존슨도 말했다. “황금욕은 무정하며 잔인하다. 저속한 인간의 최후의 타락이다.” 아주 옛날 옛적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도시를 약탈하고 사람을 가정과 고향에서 몰아내는 것은 돈이다. 돈은 천부의 순진성을 뒤틀어 타락시키며, 부정직한 습성을 키워준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말이다.




확실히 돈이 문제긴 문제다.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해서 돈은 항상 인간사의 문제적 중심에 있었다. 돈 때문에 인간은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돈 때문에 지극히 불행할 수도 있었다. 돈으로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돈 때문에 그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돈에 대한 인간의 태도이다. 돈은 인간 삶의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이 있거니와, 프랑스의 경험 철학자 베이컨은 “돈은 최선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렇다. 우리는 돈을 ‘최선의 종’으로 부릴 수 있는 주인이어야 한다. 결코 ‘최악의 주인’으로서의 돈을 섬기는 종이어서는 안 된다. 문학에서 돈 이야기는 이 같은 사람살이의 진정한 태도에 대해 여러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



신라 시대 김방이 이야기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를 하나 들어보자. 옛날, 옛적 신라 시대 때 얘기다. 마음씨 착한 형과 나쁜 동생이 살았더란다. 마음씨 나쁜 동생은 대단한 부자였다. 그러나 착한 형은 매우 가난하여 이웃에서 밥과 옷을 빌어먹으며 지냈다. 이토록 딱한 사정의 형을 불쌍하게 여겨, 마을의 어떤 사람이 그에게 빈 터 한 뙈기를 주었다. 그러나 형은 그 터에 심을 곡식 한 알도 없었다. 이에 동생을 찾아가 누에와 곡식을 좀 달라고 간청했다. 동생은 씨앗을 모조리 쪄서 주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형은 누에씨를 놓았다. 알을 깔 무렵이 되자 구사일생으로 단 한 마리의 누에가 생겼는데, 그 놈의 눈이 한치가 넘게 컸다. 열흘이 지나자 누에는 황소만큼이나 자랐다. 동생이 이를 일고 엿보다가 그 누에를 죽여 버렸다. 그랬더니 며칠 사이에 사방 백리 안에 있는 누에들이 모두 형의 집을 찾아 들었다. 왕누에를 찾아든 것이다. 부근의 온 마을이 찾아든 누에를 쳐서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곡식 씨앗도 단 한 톨이 자라났다. 이것 역시 이삭 길이가 한 자가 넘게 자라는 거대작물이 되었다. 형이 이를 지키고 있는데, 어느 날 새 한마리가 이삭을 꺾어 물고 달아났다. 형이 그 새를 쫓아 산으로 따라 갔더니 새가 어느 바위 틈 속에 숨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미 해가 저문 때였다. 할 수 없이 형은 거기서 머물게 되었다. 그때였다. 붉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나타났다. 한 아이가 “너희들은 무엇이 먹고 싶니?” 하니까 다른 아이가 “술이 먹고 싶다” 하였다. 그러자 물었던 아이가 금방망이를 꺼내 두드리자 술통이 나왔다. 또 다른 아이가 “나는 음식이 먹고 싶다”하였다. 방망이를 돌에 두드리자 역시 떡과 고기가 쏟아졌다. 아이들은 이를 실컷 먹고 놀았다. 그러다가 그 방망이를 돌 틈에 끼워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형은 이때다 싶었다. 그 방망이를 주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 금방망이로 두드려 해결했다. 이 소문을 동생이 들었다. 여기서 동생이 가만히 있으면 이야기가 싱겁게 끝난다. 욕심 사나운 동생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한 일이다. 동생은 형의 행로를 되밟아간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이미 예측할 수 있다. 산 속에서 도깨비들을 만난다. 도깨비들이 동생에게 와락 달려든다. “이 놈이 우리 금방망이를 훔쳐간 놈이로구나!” 도깨비들이 동생의 코를 빼어 버린다. 코 빠진 꼴이 마치 코끼리 같이 되었다 한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려댔다.동생은 부끄럽고 분해서 그만 죽어 버린다. 



권선징악의 정석 


이른바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의 원조 격이자 또 흥부전 계열의 이야기의 모태가 되는 이야기다(흥부전과는 형과 아우의 성격이 뒤바뀌어 있다). 도깨비 방망이는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 이것이 정식이다. 그런데 그 도깨비 방망이를 그대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착한 행위가 뚜렷한 이유 없이 대물림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돈 많이 번 재벌이라도 그걸 그대로 대물림해서는 안 된다고 도깨비 방망이가 이미 계시한 것일까. 여하튼 형의 자손들이 훗날 그 방망이를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 “똥 나와라” 했더니, 뇌성벽력이 일어나는 통에 그만 그 방망이가 온 데 간 데 없어졌다고 전한다. 이른바 「김방이」 이야기로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전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얼마든지 많다. 가령 충북 중원 지방에 전하는 이야기 하나만 더해 보자. 옛날, 옛날에 한 마을에 혹 달린 두 사람이 살았더란다. 김 첨지는 가난했고, 최 씨는 부자였다. 김 첨지가 산에 나무를 하러 가서 소리를 하니 도깨비들이 모여들어 혹을 떼 가고 금은보화를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부자 최 씨가 산에 가서 소리를 하니 도깨비들이 오히려 혹을 하나 더 붙여 주었다. 결국 김 첨지는 혹 떼고 부자가 되었고, 최 씨는 혹 하나 더 붙이고 망했다. 이야기는 “김 첨지는 후한 사람이라 그러이, 최씨 보고 앞으로는 후하게 베풀고 잘살자 그래”로 끝난다. 이밖에도 도깨비 혹은 도깨비 방망이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많다. 서양의 경우에는 주로 「마술 주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이것이 바로 도깨비 방망이와 같은 것이다.



도깨비 방망이, 그 선악의 바로미터 


이런 이야기들에서 도깨비 방망이는 곧 선악의 바로미터가 된다. 돈으로 대리되고 상징되는 도깨비 방망이를 통해서 나타나는 득복(得福)과 망신(亡身)이란 선(善)과 악(惡)의 대립구조가 선명한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이때 신성 또는 마성적 존재로서의 도깨비 방망이의 성격은 마력성을 지닌 돈의 본질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마력성을 지닌 돈은 부자와 빈자 사이에서 악행과 선행 그리고 징벌과 보상의 인과론적 기능의 중개자가 되는 게 분명하다. 다시 말해 도깨비 방망이는 돈에 대한 인간 욕망의 형식과 윤리를 적절히 반영한다. 주지하다시피 돈은 사회생활의 필수품이요 인간 행위의 기초이며 부의 상징으로 소유욕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파멸의 길로 통하는 마신(魔神)의 미끼이며 유혹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를 비롯한 우리네 기층 민담에서는 대개 도덕적인 관점에서 돈의 부정적인 면을 경계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특히 색의 음란을 경계한 것이라면, 우리의 민담들은 대부분 돈의 인색과 타락을 무엇보다도 경계한 것이라 하겠다.


도깨비 방망이는 돈 방망이였고, 또 그것은 인간의 마음 방망이였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인간에게는 보상의 의미로서 돈 방망이 구실을 톡톡히 해주었지만, 돈에 집착하여 타락한 인간에게는 징벌의 의미로서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여기에 우리 선인들이 지녔던 도덕적인 금전관이 들어있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무엇보다 우선해서 사람살이의 근본을 강조했던 터였다. 청빈(淸貧)이나 안빈낙도(安貧樂道), 안빈자족(安貧自足)을 특별히 강조하고 실천하려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도덕적 자세와 성실한 노력으로 인생의 열매를 거두고자 했던 선인들의 생각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생활 윤리의 오래된 거울이 되고 있다. 방이의 자손들처럼 도깨비방망이를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출처 화폐와 행복 1+2, 문학 속의 돈 이야기1

글 우찬제 문학비평가,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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