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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SCO 이야기/화폐와 행복(사보)

문화 속의 돈 이야기 <복덕방>

by 한국조폐공사 2017. 2. 9.

노년의 경제학과 비극적 우수

-이태준의 복덕방

 

우찬제(문학비평가, 서강대 교수)

 

이란 왕실의 주치의로 활동했던 원로 한의사가 1300억 상당의 재산을 자기 모교에 기증했다는 소식이 눈길을 끈다. 나라와 모교 덕분에 그 동안 잘 살았으니 그 보답을 해야 한다고 했다.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분처럼 자신이 이룬 부를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까지 많은 이들은 자기 재산을 언제, 어떻게 물려주는 것이 좋은가 고민한다. 재산을 빨리 물려주면 오히려 자식들한테 당할 수도 있고, 이혼율이 높기 때문에 공연히 남의 자식 좋은 일 시킬 수도 있다고 말하는 노인들도 있다. 그래도 일정한 자산을 자니고 있어 사회에 환원할 것인지를 고민한다든지, 언제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인지를 고민하는 노인들은 행복한 축에 속할 것이다. 대다수 노인들의 고민은 그보다 훨씬 서글픈 것들이다. 문명과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평균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노인 문제가 사회화된 지도 오래 되었다. 인생의 황혼길에 선 많은 노인들이 핵가족 제도와 자식들의 무관심에 따른 소외감, 경제적 무능력 상태에 따른 빈곤감, 질병에 의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그다지 새삼스런 정보가 아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종종 신문의 사회면에서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노인들의 애절한 사연을 접하기도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흔히 젊어서 돈 없는 것도 슬프지만, 늙어서 돈 없는 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일이라고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80년 전에도 이미 돈 없는 설움 때문에 자살하는 노인들이 있었다. 이태준의 복덕방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안초시 영감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1930년대 우리 소설계에서 가장 뛰어난 단편소설 작가로 평가되는 이태준이 1937년에 쓴 이 소설은 지금 읽어도 매우 실감이 난다.


젊은 시절에는 그런대로 잘 살았던 안초시는 환갑을 앞둔 늘그막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게 살아간다. 딸이 가끔씩 쥐어주는 용돈으로는 담뱃값도 제대로 충당하지 못할 정도이고, 친구인 서참위가 운영하는 복덕방에서 잠을 자는 신세다. 안초시의 딸 안경화는 유명한 무용가인데, 아비 돌보기를 소홀히 한다. “평양으로 대구로 다니며 지방 순회까지 하여서 제법 돈냥이나 걷힌 것 같으나 연구소를 내느라고, 집을 뜯어고친다, 유성기를 사들인다, 교제를 하러 돌아다닌다 하느라고, 더구나 귀찮게만 아는 이 애비를 위해 쓸 돈은 예산에부터 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고 생각하는 안초시는 여간 서글픈 게 아니다. 낡은 홑옷이 추워 셔츠 한 벌을 사달라고 해도 겨울이 다가도록 딸은 모르는 척 한다. 안경다리가 부러져 고치겠다고 일원만 달래도 딸은 일원 짜리를 굳이 바꿔다가 오십전 한닢만달랑 준다. 그러면서도 딸은 아버지 보험료로 한달에 삼원 팔십전씩나간다고 너스레를 떤다. 이럴 때마다 보험료나 타먹게 어서 죽어 달라는 소리로 들려 안초시는 슬프고 또 슬프다. “정말 날 위해 하는 거면 살아서 한푼이라두 다오. 죽은 뒤에 내가 알 게 뭐냐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한다. 이런 처지의 안초시는 그저 복덕방에서 회투로 재수떼기나 하면서, 언제 돈 좀 벌어볼 기회가 생기질 않나 헛궁리하면서, 서글픈 시간을 죽일 따름이다. 돈 없는 자기 신세에 대한 그의 페이서스는 참으로 어지간하다.

 

예순이 낼 모레…… 젠장할 것.”

초시는 늙어가는 것이 원통하였다. 어떻게 해서나 더 늙기 전에 적게 돈 만원이라도 붙들어가지고 내 손으로 다시 한번 이 세상과 교섭해보고 싶었다. 지금 이 꼴로서야 문화주택이 암만 서기로 내게 무슨 상관이며 자동차비행기가 개미떼나 파리떼처럼 퍼지기로 나와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이냐. 세상과 자기와는 자기 손에서 돈이 떨어진, 그 즉시로 인연이 끊어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면 송장이나 다름없지 뭔가.’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박희완 영감으로부터 투기하기 좋은 정보를 얻어듣게 된다. 한 유력자에게 들은 정보라면서 박영감이 이르기를 황해 연안에 제2의 나진이 생긴다니 그곳에 땅을 미리 사두면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나진의 경우 오륙전 하던 땅이 한번 개항된다는 소문이 나자 당년으로 오륙전의 백배 이상이 올랐고 삼사년 뒤에는, 땅 나름이지만 어떤 요지(要地)는 천배 이상이 오른 데가 많았던 것이다. 안초시는 귀가 솔깃해졌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황해 연안에 곧 큰 항구가 생길 것 같았다. 자신이 그토록 소망하던 마지막 호기가 이것이지 싶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로 인해 그의 주먹구구는 자못 흥에 넘쳐 있다.

 

이사는 팔 하고 사오는 이십이라 천이 되지…… 가만…… 천이라? 사루 했으니 사천이라 사천평…… 매평에 아주 줄여잡아 오환씩만 하게 돼두 사환 칠십오전씩이 남으니, 그럼…… 사사는 십육 일만육천환하구……

안초시가 다시 주먹구구를 거듭해서 얻어낸 총액이 일만구천원, 단 천원만 들여도 일만구천원이 되리라는 셈속이니, 만원만 들이면 그게 얼만가?

 

이런 속셈으로 그는 딸에게 이를 설명하고 돈을 융통할 것을 부탁했다. 안경다리값 일원에도 인색하던 딸은 일확천금을 거머쥘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연구소를 담보로 삼천원을 대여했다. 참천원으로 땅을 사던 날 딸은 아버지에게는 일원 짜리 하나 손에 만져보지도 못하게 하고, 자기 애인인 청년을 앞세워 일을 처리케 하였다. 이 처사에 안초시는 또한 못마땅했지만, “적어도 삼천원의 순이익이 오륙만원은 될 것이라, 만원 하나야 어디로 가랴 하는생각으로 부풀어 노여움을 삭인다.


일년이 지났다. 참천원을 투자하여 땅을 사놓고 날마나 신문을 훑어보고 또 수소문도 하여 보았지만, 황해 연안에 항구가 생긴다는 소식은 없었다. 그곳에 아닌 다른 곳에는 땅값이 몇십배씩 올라 졸부들이 생겼다는 소식이 많았지만, 유독 그곳만은 감감소식이었다. 나중에야 안초시는 자기가 속은 것을 알게 되었다. 박영감 자체가 관변 아무개한테 우선 사기당한 텃수였다. “축항 후보지로 측량까지 하기는 하였으나 무슨 결점으로인지 중지되고 마는 바람에 너무 기민하게 거기다 땅을 샀던, 그 모씨가 그 땅 처치에 곤란하여 꾸민 연극에 박영감과 안초시가 놀아나고 만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잘못되자, “돈을 쓸 때는 일원짜리 한장 만져도 못 봤지만 벼락은 초시에게 떨어졌다.” 딸한테 밥조차 얻어먹기 힘들게 되었다. “재물이란 친자간의 의리도 배추 밑 도리듯 하는 건가?”라고 회한에 빠진 안초시는 이미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들 정도로 망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안초시는 또 때묻은 홑적삼 생각에 눈물을 흘리다가 이를 위로하려는 친구 서참위가 사주는 술을 밤늦도록 얻어 마시고 복덕방에 돌아와 약을 먹고 자살하고 만다.


이야기는 자살 이후 장례식 풍경까지 이어져 독자들의 가슴을 더욱 아리게 만든다. 복덕방에서 자살한 안초시를 발견한 서참위는 딸에게 연락 후, 관청에 알리려 한다. 그러자 딸은 자기 명예를 생각해서 신고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서참위는 비밀을 지켜주는 대신 안초시 명의로 든 보험료 사백팔십원을 그를 위해 모두 쓰라고 딸에게 말한다. 고인이 평소 속셔츠를 입고 싶어 했지만 입지 못하고 죽었으니, 상등 털셔츠를 사다 입히고, 그 위에 진견으로 수의 일습을 구색 맞춰 입히고, 공동묘지라도 특등지로 널찍하게 사고, 장례식을 장하게 치룰 것을 주문한 것이다. 이 주문은 아비의 자살 사건이 탄로날까 두려워하는 딸에 의해 이행된다. 장례식날 서참위의 다음과 같은 조사가 다시 한번 우리의 가슴을 시리게 만든다. “나 서참윌세, 알겠나? …… 자네 참 호살세 호사야…… 잘 죽었느니, 자네 살았으문 이만 호살 해보겠나? 인전 안경다리 고칠 걱정두 없구…… 아무튼지……


초시니, 참위니 하는 호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봉건시대에 태어나 근대적 자본주의 시대로 이행되는 초기를 살다 죽어간 사람들의 비애와 우수를 다룬 작품이다. 이제 막 돈이 사회의 가장 위력적인 변수로 등장하던 시기에 돈 없는 노인의 몰락한 삶과 일확천금을 노릴 수밖에 없었던 사정, 돈의 결핍으로 인해 부녀간의 친애마저 버림받아야 했던 비애, 그리고 비극적인 자살 등 이 소설이 환기하는 여러 문제의식은 지금도 그다지 낡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 혹 허름한 변두리 복덕방에 들를 일이 있거들랑 잘 눈여겨 볼 일이다. 혹시 제2, 3의 안초시 영감 같은 노인이 시름에 젖어 화투패나 만지작거리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출처 : 화폐와 행복 1+2 『문화 속의 돈 이야기』 


글  우찬제 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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