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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SCO 이야기/화폐와 행복(사보)

[책 읽기 좋은 날 ⑤-1] 바다에는 이순신, 땅에는 황진

by 한국조폐공사 2021. 11. 30.

책 읽기 좋은 날⑤-1

바다에는 이순신, 땅에는 황진 

『임진무쌍 황진』

글 최보기(북 칼럼니스트)

   ‘Molon Labe!’(와서 가져가라!). BC 480년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초대형 원정대가 그리스로 밀려들자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결사대 300명을 이끌고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맞았다. 크세르크세스가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하자 레오니다스는 “Molon Labe!”를 외쳤다. 테르모필라이 협곡에 “여행자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들의 명령에 따라 여기에 누워 있다고”라 새긴 비명이 남겨졌다. 이 전투가 배경인 영화가 <300>이다. 

임진왜란 개전 한 달도 안 돼 수도 한양이 점령당했다. 이순신 장군에게 해로가 막힌 왜군은 조선의 곡창이자 병참기지 호남을 치기 위해 군사 1만 5,000명을 보내 충청도 금산을 점령, 전주를 노렸다. 왜군이 전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은 금산에서 이치(배티재)를, 진안에서 웅치(곰티재)를, 장수에서 남원을 통하는 것이었다. 근왕병을 모집해 중앙으로 보내버린 호남에 남아있는 군사는 의병까지 2,500명이었다. 전라절제사 권율은 이치와 웅치, 남원에 군사를 나누어 마지노선을 구축했다.

전투는 먼저 웅치에서 벌어졌다. 웅치 1방어선을 맡은 의병장 황박 부대 200명이 장렬하게 무너졌다. 나주 판관 이복남 부대 500명이 지키는 2방어선도 장렬하게 무너졌다. 고개 꼭대기 마지막 3방어선에는 김제 군수 정담과 300명의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한 명 남김없이 목숨을 바쳤다. 웅치를 지나 안덕원에 머물던 왜군은 뒤늦게 남원에서 달려온 동복 현감 황진 부대의 기습에 패해 금산으로 철수했다. 연이어 이치대첩이 벌어졌다. 이치 사수 지휘봉은 황진에게 주어졌다. 황진의 노련한 전술과 결사항쟁에 나서는 조선군의 투지에 밀려 타격을 입은 왜군은 이치를 넘지 못하고 금산으로 후퇴했다.

1년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차 진주대첩 패배를 설욕하고, 호남을 궤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왜군 10만 명이 진주성으로 향할 때 조선군은 수성과 후퇴로 의견이 갈렸다. 도원수 권율은 후퇴를 결정했고, 의병장 곽재우도 수성을 포기했다. 진주성에는 6만 여명의 백성이 머물고 있었다. 나주 의병장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가 무너지면 호남이 뚫린다’며 부대를 이끌고 가장 먼저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뒤를 따랐다. 성안에 군사는 관군과 의병을 합해 6,000명에 불과했다. 무관 황진에게 진주성 사수를 지휘할 순성장 임무가 주어졌다. 그들은 최후의 1인까지 진주성에서 순국했다. 비록 중과부적으로 사수대는 패했지만 만만찮게 타격을 입은 왜군 역시 호남 진격을 포기해야 했다. 
테르모필라이 전투에 뒤질 것 없는 장엄한 서사를 가진 웅치, 이치, 2차 진주성 대첩 선봉에 섰던 황진 장군 역시 항복을 요구하는 왜장에게 외쳤다. “와서 가져가라!” 영화 <300>의 배경은 한반도에도 넘친다.

◇임진무쌍 황진 ㅣ김동진 지음ㅣ교유서가ㅣ320쪽◇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현재 주간 '시사저널'에 <최보기의 책보기> 코너를 연재하고 있다. 『거금도 연가』, 『놓치기 아까운 젊은 날의 책들』, 『박사성이 죽었다』, 『독한 시간』등의 저서를 출간했다.

사보 『화폐와 행복』(2021) 11+12월호, 55p

*본지에 실린 글들은 각 필자 개인의 의견을 반영한 것으로 한국조폐공사의 공식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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