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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SCO 이야기/화폐와 행복(사보)

[책 읽기 좋은 날 ⑤-2] (주)조선 CEO, 세종의 경영철학과 리더십 이야기

by 한국조폐공사 2021. 11. 30.

책 읽기 좋은 날⑤-2

㈜조선 CEO 세종의 경영철학과 리더십 이야기
『국가경영은 세종처럼』

글 최보기(북 칼럼니스트)

   태조 이성계를 이어 조선 왕조 기틀을 다진 태종(이방원)에게는 양녕, 효령, 충녕 등 세 명의 왕자가 있었다. 장남인 양녕이 자연스럽게 왕세자로 책봉됐으나 잦은 말썽을 일으켰다. 결국 양녕을 폐하고 셋째 충녕 이도에게 뒤를 잇게 했다. 21세 청년은 왕세자 수업도 제대로 못 받은 채 갑작스럽게 왕좌에 앉아야 했다.

실권을 쥔 상왕 태종과 내로라하는 공신들 사이에서 젊은 왕 세종의 입지는 불안했다. 왕위에 오르고 얼마 후 장인 심온이 좌의정 박은의 무고로 상왕 태종으로부터 사약을 받는데도 왕 세종은 손 하나 못 쓰는 ‘허세’였다. 폐세자 형 양녕과 둘째 효령까지 있는 상황에서 그가 왕좌를 공고히 하기까지는 곳곳의 암초와 장애물을 헤쳐 나가야 했다.
젊은 세종은 두려워하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안으로 이미 많은 준비가 돼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조선 최고 성군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세종이 그토록 뛰어난 국가경영 치적을 쌓았던 배경은 ‘공부, 배려, 민생, 실용주의, 추진력, 선공후사, 솔선수범’이다.

왕자 시절 너무 책만 봐서 큰일이라고 태종이 걱정했을 만큼 공부를 많이 했던 탓에 감히 세종에게 사실(fact)과 논리로는 대적할 신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모두가 수긍하는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토론으로 여론을 수렴했다. 세종실록에 가장 잦게 등장하는 말은 “의논하여 보고하라!”다.

흉년으로 굶는 백성이 늘어나면 왕자 충녕이 사는 집 앞에는 거지들이 줄을 섰고, 충녕은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눠줬다. 그런 일이 너무 잦아 아버지 태종이 걱정할 정도였다. 출산휴가! 관비가 아이를 낳으면 100일 동안 집에서 쉬도록 법으로 정한 왕도 세종이었다. 세종의 정책 최우선 순위는 민생이었다. 민생은 백성들이 최소한 굶지는 않는 일인데 세종은 자나 깨나 이부터 걱정했다. 낮은 곳에 있는 백성들을 배려해 민생을 챙기는 일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의 디테일에 강해야 가능하다. 세종은 디테일에 강했다.

세종은 실용을 우선하며 강한 추진력을 발휘했다. 이과(理科)에 밝은 장영실을 포함해 기술자들을 극진히 챙겼다. 선진 기술을 보유한 중국인이 조선에 오면 신분과 결혼 등으로 최대한 호의를 베풀어 귀화시켰다. 세종은 조선 땅에는 효용이 없다며 반대하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수레를 전국에 보급하도록 강행했다. 무과 시험에 문과 과목을 추가해 무관의 위상과 지력을 높임으로써 한 세기 후 한자(漢字)로 『난중일기』를 남긴 임진왜란 영웅 이순신 장군이 나올 수 있도록 했다. 

세종의 황금치세를 일군 일등 신하는 황희, 맹사성이 아닌 류관이었다. 류관은 청렴과 선공후사(先公後私)의 대명사였는데 그의 부음을 들은 세종은 손수 흰옷을 입고 홍례문 밖에 나가 눈물을 쏟았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했던 ‘세종 리더십’의 근본은 ‘솔선수범’이었다.

◇국가경영은 세종처럼 ㅣ박영규 지음ㅣ통나무ㅣ320쪽◇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현재 주간 '시사저널'에 <최보기의 책보기> 코너를 연재하고 있다. 『거금도 연가』, 『놓치기 아까운 젊은 날의 책들』, 『박사성이 죽었다』, 『독한 시간』등의 저서를 출간했다.

사보 『화폐와 행복』(2021) 11+12월호, 56p

*본지에 실린 글들은 각 필자 개인의 의견을 반영한 것으로 한국조폐공사의 공식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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