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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SCO 이야기/화폐와 행복(사보)

[조희창의 클래식 읽기 ⑥] "치기 어려 아름답던 젊은 날"

by 한국조폐공사 2021. 11. 30.

조희창의 클래식 읽기⑥

“치기 어려 아름답던 젊은 날”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 중 ‘그대의 찬 손’
Puccini, <La Boheme> 'Che Gelida Manina'

글 조희창(음악평론가)

지아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지나간 시절을 되짚어보면, 종종 어처구니없을 만큼 치기 어리게 느껴지곤 한다. 스스로 시대의 반골이자 보헤미안이라 여겼고, 어쩌면 그 힘으로 살았던 것 같다. 필자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1838년 파리에도 그런 청춘들이 살고 있었다. 로돌포, 콜리네, 쇼나르, 마르첼로라는 친구들의 직업은 각각 시인, 철학자, 음악가, 화가다. 예나 지금이나 지지리 궁상일 수밖에 없는 처지이지만, 자존심만큼은 하늘을 찌른다. 소설가 앙리 뮈르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 <보헤미안의 생활 풍경>이라는 작품을 발표했고, 이 소설을 토대로 이탈리아의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가 오페라 <라 보엠>을 만들었다. 
‘라 보엠’(La Boheme)은 집시풍으로 사는 사람들을 은유적으로 일컫는 단어다. 원래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 유랑 민족인 집시가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보헤미안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집시를 상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단어는 ‘속물’이나 ‘기성세대’에 대비되는 단어로 정착된다. 사회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방랑자,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예술가, 문학가, 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래서 이 오페라에는 특별한 영웅도 없고 악당도 나오지 않는다. 치정과 배신과 탐욕으로 죽고 죽이는 드라마가 아니라, 믿는 것이라고는 문학과 예술 밖에 없는 가난한 청춘들의 일상이 펼쳐진다. 

열쇠와 촛불이 만들어내는 사랑가
파리 라탱 지역의 싸구려 방에 네 명의 친구들이 세 들어 살고 있다. 겨울이 되었는데 방세는 밀리고 난로에 넣을 땔감마저 다 떨어졌다. 그때 음악가인 친구가 레슨비를 벌었다며 신이 나서 들어온다. 어라, 돈이 생겼네, 집세는 무슨 집세, 술이나 마시러 가자! 너무나도 익숙한 청춘의 공식을 따라 그들은 술을 마시러 간다. 
시인 로돌포는 원고를 끝내고 가기 위해 잠시 남는데, 그때 운명적인 노크 소리가 들린다. 옆집에 사는 미미가 열쇠를 떨어트렸는데, 촛불이 없어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촛불 좀 빌려주세요.” 이 대목에서부터 오페라는 보헤미안의 삶에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소재인 사랑 이야기로 넘어간다. 촛불 하나로 시작되는 노래는 오페라 역사를 찬란하게 밝히는 불빛이 된다.  
로돌포는 미미와 함께 캄캄한 방을 더듬다가 열쇠를 찾아내지만,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고는 계속 찾는 척한다. 그러다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손이 맞닿는다. 로돌포는 미미의 손이 너무 차다면서 그 손을 잡고 녹여 주겠다고 한다. 이런 식의 구도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너무나도 구태의연한 설정이지만, 푸치니 당시의 오페라 세계에선 획기적이었다. 오페라의 무대가 신화나 전설의 영웅담에서 서민들의 자질구레한 일상으로 이동한 것이다. 

&lt;라 보엠&gt; 1막의 유명한 '열쇠 장면', 로돌포는 미미의 손을 잡고 &lt;그대의 찬 손&gt;을 부른다.

‘신파’가 ‘전설’이 되는 순간
자, 손을 잡았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이때, 로돌포가 부르는 노래가 테너 역사에 남는 명곡 <그대의 찬 손>(Che Gelida Manina)이다. “내가 누구냐고요? 나는 시인이에요. 뭘 하냐고요? 시를 쓰지요. 어떻게 사냐고요? 그냥 살아요.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백만장자랍니다”라고 허세를 떨며 그동안 미미를 마음에 두었음을 얘기한다. “내 마음의 금고에 간직해온 꿈들이 당신의 두 눈 때문에 모두 날아가 버렸어요. 대신 그곳에 달콤한 희망이 자리 잡았죠”라는 식의 유치 발랄한 고백을 한다. 만일 이것이 연극의 대사였다면 형편없는 장면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어설픈 고백은 대사가 아니라 노래다. 그것도 막강한 오케스트라가 뒷받침하고 있는 푸치니의 노래다. 그 찬란한 음악의 힘 때문에 청중은 꼼짝할 수가 없다. 
유치한 신파조의 노랫말은 마치 오래된 풍경화처럼 향기를 내뿜기 시작한다. 몽롱하게 시작된 노래는 점점 격렬해지다가 하이 C의 막강한 고음으로 불을 댕긴다. 이 노래에 이어서 미미는 <내 이름은 미미>라는 답가를 부르고, 두 사람이 같이 사랑의 이중창을 부르면서 오페라의 1막이 끝난다. 
불행히도 이 아름다운 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현실 앞에서 보헤미안은 무력해지기 일쑤다. 로돌포는 사랑하는 여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자신의 가난한 신세에 낙담하여 미미를 떠나보내고, 마음을 크게 다친 미미는 병든 몸을 전전하다가 죽기 전 로돌프와 친구들을 찾아간다. 로돌포가 손을 잡아주자 미미는 이제 손이 따뜻해지는 걸 느낀다면서 영원한 잠 속으로 빠져든다.
미미의 죽음으로 청춘의 시대는 끝난다. 보헤미안의 치기와 순수도 끝나고 그들 역시 기성세대로 진입한다. 젊은 날의 이야기들은 결코 돌아갈 수 없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남게 된다. 

 

 * 유튜브를 통해 유시 비욜링, 루치아노 파바로티, 로베르토 알라냐 등의 명가수가 부른 곡을 들을 수 있다. 소개하는 영상은 테너 롤란도 비야손이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와 주연한 영화판 오페라다. 

 

조희창 (음악평론가) │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대전예술의 전당 외 문화예술회관, 기업에서 공연해설 및 클래식 음악 강의를 하고 있다. 소니뮤직 클래식 담당, KBS 1FM 작가, KBS 1TV <클래식 오디세이> 대표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월간<객석> 기자, 월간 <그라모폰 코리아> 편집장 <윤이상평화재단> 기획실장, 예술경영지원센터 공연예술행사 음악분야 평가위원 역임하고 있다. 저서로는 ‘클래식 내비게이터’, ‘베토벤의 커피’ 등이 있다.

사보 『화폐와 행복』 11+12월호(2021년), 47-48p

※ 사보 『화폐와 행복』에 게재된 글들은 각 필자 개인의 의견을 반영한 것으로 한국조폐공사의 공식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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