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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SCO 이야기/화폐와 행복(사보)

경쾌한 산책자의 탬버린 독주곡,『냉면꾼은 늘 주방 앞에 앉는다』

by 한국조폐공사 2021. 9. 27.

책 읽기 좋은 날 ④-1

경쾌한 산책자의 탬버린 독주곡,
『냉면꾼은 늘 주방 앞에 앉는다』

 

글 최보기(북 칼럼니스트)

  수필집 『냉면꾼은 늘 주방 앞에 앉는다』 저자 고두현은 신문사에서 문화부 기자를 오래 한 시인이다. 문화부 기자 출신 작가는 문장력도 문장력이지만 아는 게 많다. 소설가 김훈이 문화부 기자 출신이다. 김훈 문장이 ‘베이스 기타’라면 고두현 문장은 ‘탬버린’이다. 문학 바탕이 소설과 시로, 노는 물이 달라서 그럴 것이다. 고두현 수필집은 ‘산책자를 위한 인문 에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나무 사이를 산책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쳐 소요(逍遙)학파가 생겼듯 산책(散策)에는 평화, 자유, 사유, 성찰이 있다.

시인 고두현은 여수반도와 나란히 선 섬 남해 출신이다. 이성복 시인이 『남해금산』에서 노래한 남해는 어느 섬이나 그런 것처럼 애잔한 전설이 많다. 끝없이 육지를 바라보는 섬의 정서 때문일 것인데 섬 출신 문학인들 역시 그들만 가질 수 있는 특권, 사물을 남다르게 자세히 보는 섬세함이 영혼에 스며있다.
 
‘섬 출신 시인 고두현’의 산책길은 다채롭다. 『메밀꽃 필 무렵』 봉평에서 늙은 장돌뱅이 허 생원과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 아래 메밀밭을 거닌다. (‘흐뭇한 달빛’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원전에는 ‘흐붓한 달빛’이라 한다.) 순천 여자만에서는 ‘밤 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빙 둘러싼’ 『무진기행』을 김승옥과 걷는다. 기차 종점도, 강 건너 여의도 비행장에 불빛도 사라져버린 마포를 걸을 때면 꼴뚜기젓, 새우젓이 입에 침을 고이게 한다. 마포를 산책할 때면 마포대교만 볼 것이 아니다. 마포삼포(서호, 마호, 용호 포구) 역사와 마포팔경 풍광을 봐야 한다. 마포구 토정동은 『토정비결』을 쓴 토정 이지함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나그네는 길만 걷는 게 아니다. 문화, 정신, 생활도 걷는다. 1920년대 작가 김소저는 냉면은 ‘살얼음 김칫국에다 한 저 두 저 풀어 먹고 우루루 떨어져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이라고 찬양했다. 평양냉면의 메밀면은 이가 아니라 목젖으로 끊어야 하므로 입안 가득 넣고 먹어야 메밀 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냉면꾼은 늘 주방 앞에 앉는’ 이유는 면발이 붇기 전에 일초라도 빨리 맛을 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야기꾼에게는 냉면 한 사발이 이야기 한 보따리다.

‘혼자 여행할 땐 새우를 먹지 말라’니 이 무슨 말일까? 새우는 간 해독 작용이 뛰어나 술안주로 좋지만 아르기닌 성분이 많아 정력제로 간주하기 때문인데 한 번에 수십만 개의 알을 낳는 왕성한 생명력이 새우를 상징한다. ‘굽은 허리도 펴게 하는 가을 스태미너식 새우’는 시인의 ‘구라’가 아니라 명나라 약학서 『본초강목』에 기록돼있는 말이다. 시인은 또 기자라서 ‘손이 가요 손이 가는 새우깡’ 한 봉지에 새우가 몇 마리나 들어있는지도 안다. 통통한 놈으로 4마리가 들어간다. 코로나19 칩거시대에 방구석 양탄자를 타고 온 지구를 소요할 만한, 경쾌한 탬버린 수필집이다.

◇냉면꾼은 늘 주방 앞에 앉는다ㅣ고두현 지음ㅣ문학의숲ㅣ256쪽◇

 

사보 『화폐와 행복』 9+10월호(2021년) 65p 게재 

※ 사보 『화폐와 행복』에 게재된 글들은 각 필자 개인의 의견을 반영한 것으로 한국조폐공사의 공식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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