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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SCO 이야기/화폐와 행복(사보)

[그림보고 화가 읽기⑪] ‘오판’되고 ‘은폐’됐던 최초의 추상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by 한국조폐공사 2021. 9. 27.

그림보고 화가 읽기⑪ 

‘오판’되고 ‘은폐’됐던 최초의 추상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글 이은화(미술평론가)

 

어느 분야든 ‘최초’는 대단히 중요하다. 최초로 이룬 자들만이 역사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역사상 최초의 추상화가로 알려져 있다. 화가 자신도 그렇게 확신했다. 1935년 뉴욕 화상 제롬 노이만에게 보낸 편지에도 그렇게 썼다. “실제로, 그 그림은 세계 최초의 추상화입니다. 왜냐면 당시 단 한 명의 화가도 추상화 형식의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역사적인 그림’입니다.” 그가 언급한 세계 최초의 추상화는 1911년에 그려 같은 해 뮌헨 전시에 출품한 작품이었다. 1921년 러시아를 떠나 독일로 갈 때 챙기지 못해 분실한 그림이었다. 한데 칸딘스키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보다 앞서 추상화를 그린 화가가 있었다는 것을. 그것도 미술계의 변방이었던 북유럽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세계 최초의 추상화가는 누굴까? 바로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다. 비교적 최근에 재조명 받으며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화가다. 1862년 스웨덴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클린트는 스톡홀름 왕립미술원에서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전문 화가였다. 당시 스웨덴은 예술의 선진국이었던 프랑스나 이탈리아, 독일보다 먼저 여학생의 미술대학 입학을 허용했던 나라였다. 5년간의 학업을 마친 클린트는 1887년 졸업 후 작업실을 열고 풍경화가와 초상화가로 활동하며 꽤 인정을 받았다. 사실주의 회화에 뛰어났던 클린트가 추상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미대 입학 전인 18세 때부터였다. 열 살짜리 여동생 에르미나의 죽음을 가까이서 목격한 후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됐다. 개신교도였던 그녀는 동생의 죽음 이후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되면서 신지학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전자파와 X선 발견 등 과학이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발전하던 시대였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탐구하며 이를 화폭에 담고자 했다. 

▲원시적 혼돈, No.16, 1906-7년

 

최초의 추상화가 탄생하다 
졸업 후 화가로 활동하던 어느 날, 클린트는 신의 계시 같은 음성을 듣는다. “너의 새로운 철학으로 스스로 새 왕국을 세워라”, “너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것이다.” 환청이었는지 자신의 간절한 바람이었는지 몰라도 그때부터 클린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작업에 착수한다. 명암법과 원근법 등 서양 미술의 전통과 규범을 무시한 새로운 형식의 추상화였다. 몇 번의 습작 끝에 1906년 11월부터 4개월간 생애 첫 추상화 연작을 제작했다. ‘원시적 혼돈’이란 제목을 붙인 작은 캔버스 그림들로, 기하학적인 상징이나 나선 모양 기호, 알파벳 문자 등을 빠른 붓질로 시각화한 것이었다. 

이듬해는 ‘10개의 가장 큰 그림’이라는 제목을 단 기념비적인 추상화 연작을 제작했다. 유아기부터 노년기까지 삶의 단계들을 표현한 작품으로 화면마다 자연에서 따온 곡선과 상징, 기학학적인 기호와 문자로 가득했다. 모두 그녀가 창조해낸 미술 어휘였다. 정확한 해석은 불가능하지만, 그림 속 나선형은 진화를, U자는 영적 세계를, W자는 물질을, 겹친 동그라미는 단결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또 노랑과 빨강은 즐거움과 남성성을, 파랑과 라일락색은 섬세함과 여성성을 의미한다. 이를 토대로 해석해보면, 성인 단계를 표현한 7번 그림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조화와 단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성을 상징하는 거대한 라일락색 화면 안에 남성성을 상징하는 노란 꽃잎 같은 형상이 가운데 배치돼 있고, 그 주변에는 활기찬 다양한 생명체들이 즐거운 노래와 춤으로 두 성의 결합을 축복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10개의 가장 큰 그림(No.7.성인), 1907년 
▲10개의 가장 큰 그림(No.3.청소년), 1907년


놀라운 점은 폭 3미터가 넘는 대형 그림들을 조수도 없이 혼자서 작업했다는 것이다. 키 152cm에 왜소한 체구를 가진 화가는 큰 그림을 바닥에 깔아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그렸다. 사흘 내내 쉬지 않고 그리다가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또 사흘간 그리다가 쓰러지기를 반복하며 완성한 그림들이었다. 

이해받지 못한 그림들
1908년에는 무려 118점의 대형 회화를 연달아 완성한 후 쓰러졌는데, 이렇게 무리한 이유가 있었다. 저명한 신지학자이면서 철학자이자 비평가였던 루돌프 슈타이너를 초대해 자신의 그림들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슈타이너는 기꺼이 클린트의 초대에 응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식의 추상화를 본 전문가의 반응은 어땠을까? 긍정적인 비평과 해석을 기대했던 화가의 바람과 달리 돌아온 건 충격적인 충고였다. “앞으로 50년 동안 누구도 이 그림들을 봐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위험한 그림이라는 의미였다. 낙담한 클린트는 그림을 포기했다. 그러나 4년 후 다시 붓을 잡고 자신만의 예술을 하기로 결심한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시골 농가에 은둔하며 고독하게 그림을 그렸다. 후원자나 비평가, 화상도 없이 가난하고 힘든 예술가의 삶을 그저 묵묵히 견디며 살아냈다. 그렇게 1000점이 넘는 그림을 홀로 실험하다 1944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였다. 조카에게는 자신의 작품들을 향후 20년 동안 절대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슈타이너의 말처럼 당대에 이해받지 못할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추상의 개념조차 없던 시대에, 홀로 추상화를 실험했던 화가 클린트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최근에야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201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미래를 위한 그림’이란 제목으로 클린트의 회고전을 열었다. 이 낯선 스웨덴 화가의 그림을 보기 위해 무려 60만 명이 찾아왔다. 구겐하임 역사상 최다 관객을 기록한 전시였다. 2019년에는 독일에서 그녀의 전기 영화가 만들어졌다. 오판되고 은폐됐던 여성화가 클린트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는 1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열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녀의 그림은 미래의 관객을 위한 그림이었던 것이다. 
클린트가 칸딘스키보다 5년 앞서 추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미술사는 정정돼야 할 것 같다. 칸딘스키는 최초로 추상화를 전시했던 화가였을 뿐, 클린트가 최초의 추상화가였다고. 그림을 이젤에서 분리해 바닥에 놓고 그린 혁신적 시도 역시 미국의 잭슨 폴록이 아니라 스웨덴 여성 화가 클린트가 원조라고. 그것도 최소 40년은 앞섰다고 말이다.  

 

 

사보 『화폐와 행복』 9+10월호(2021년) 63-64p 게재

※사보 『화폐와 행복』에 게재된 글들은 각 필자 개인의 의견을 반영한 것으로 한국조폐공사의 공식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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