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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SCO 이야기/화폐와 행복(사보)

동화 ‘인어공주’ 속에 숨은 아름다운 성장의 열쇠들 … 상처의 틈새로 쏟아지는 햇살을 찾아

by 한국조폐공사 2019. 7. 23.

문화마당_문학속으로3

동화 ‘인어공주’ 속에 숨은 아름다운 성장의 열쇠들 … 상처의 틈새로 쏟아지는 햇살을 찾아

정여울 작가

어떤 동화는 어른이 되어 읽었을 때 더욱 눈부신 감동으로 다가온다. ‘인어공주’의 슬픔은 사랑의 아픔을 온몸으로 체험한 어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더욱 아름답고, ‘피터팬’의 감동은 악당 후크 선장도 결국 한 명의 나약한 어른일 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어른의 눈으로 읽었을 때 더욱 크고 뜨겁게 다가온다. 왕자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왕자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코 왕자를 죽일 수 없는 인어공주의 마음은 사랑의 산전수전을 겪어본 어른들의 마음 속에 더 깊은 파문을 일으킨다. 피터팬을 괜스레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피터팬의 눈부신 젊음과 해맑은 순수를 질투하는 후크 선장의 마음을 이해한 뒤, 동화가 아닌 원작소설 ‘피터팬’을 보면 훨씬 감동적이다. 이렇듯 ‘이야기의 감동’은 나이가 들수록 더 내면에서 풍요로운 울림으로 다가오곤 한다.


‘인어공주원작을 읽어보면, 인어공주가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이 단지 한 남자를 위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어공주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세계를 동경했다. 배가 침몰하면서 바다 밑으로 내려온, 눈처럼 흰 돌로 조각된 아름다운 소년의 조각상을 아끼는 인어공주. 인어공주는 할머니에게 ‘인간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라고 조르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커다란 배와 화려한 도시들, 하늘을 나는 새, 향기를 피우는 꽃들, 그리고 인어와 달리 꼬리와 지느러미가 아닌 다리로 움직이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 할머니는 인어공주의 통과의례가 15살에 찾아옴을 알려준다. “너희들이 열다섯 살이 되면 바다 위로 나가게 된단다. 달빛이 비치는 바위 위에 앉아 지나가는 큰 배들을 볼 수 있지. 그리고 숲과 도시도 볼 수 있단다.” 인간세상에 대한 남다른 호기심을 가진 인어공주에게 할머니는 결정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어는 무려 300년 동안 아무 걱정없이 평화롭게 바닷속에서 살 수 있지만 인간은 길어야 100년 정도밖에 못 살면서 온갖 걱정과 시름에 시달려야 한다고. 하지만 인어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는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불멸의 영혼’이라고. ‘불멸의 영혼’이라는 말에 인어공주의 귀가 번쩍 뜨인다.


“우리는 불멸의 영혼이 없기 때문에 다시는 생명을 얻지 못한단다. 인간은 죽어서 흙이 된 후에도 영원히 사는 영혼을 가지고 있지. 영혼은 맑은 공기를 뚫고 반짝이는 별들 너머로 간단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자 인어공주는 ‘불멸의 영혼’이야말로 자신이 진정으로 얻고 싶어하는 그 무엇임을 깨닫는다. “우리에겐 왜 불멸의 영혼이 없나요? 단 하루만이라도 인간이 되어 별 너머에 있는 찬란한 세계에 가 볼 수 있다면 제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겠어요.” 인간세상을 잠깐 구경해 보았지만, 역시 바닷속이 제일 아름답고 편하다고 생각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언니들과는 달리, 인어공주는 목숨을 걸고 인간이 되려고 한다.


가질 수 없는 대상, 지상의 왕자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인어공주는 이미 ‘인간의 영혼’을 닮아가기 시작한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고, 닿을 수 없는 것을 열망하고, 사랑해선 안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바로 이 넘을 수 없는 경계 너머를 꿈꾸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아름답고도 위험한 본능이니까. 인어공주가 왕자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아니 인어공주가 왕자에게 일방적으로 사랑을 느낀 순간. ‘인간세계 vs 인어세계’의 육중한 경계선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한다.


왕자는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고, 인어공주는 이미 산산조각난 거대한 배의 파편에 부딪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용감하게,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천신만고 끝에 왕자를 구해낸다. 인어공주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이상형의 이미지를 왕자에게 투사한다. 어딘가에 있을 나의 간절한 반쪽을 찾는 인어공주의 마음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뚫고, 인간세계와 인어세계의 경계를 뛰어넘어, 마침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조차 뛰어넘는다. 더 높이, 더 멀리, 더욱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 인어공주의 꿈은 마녀와의 계약이라는 무시무시한 장애물을 뛰어넘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인어공주는 고통을 견뎌내고, 인간이 되었다. 왕자의 사랑과 불멸의 영혼을 얻기 위해. 하지만 왕자가 이름을 물을 때, 어디서 왔는지를 물을 때, 혀를 잃어버린 인어공주는 말을 할 수 없다. 인간의 다리를 얻은 대신 주체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인어공주는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날카로운 칼날 위를 맨발로 걷는 고통을 느꼈지만, 오히려 왕자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더욱 아름답게 춤을 추었다. 왕자와의 사랑을 위해, 불멸의 영혼을 얻기 위해 인어공주는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결국 왕자는 이웃나라의 공주를 ‘자신을 구해준 사람’으로 착각하고 결혼을 하고, 인어공주는 마침내 영원히 물거품이 되어 바다를 떠돌 위험에 처한다. 언니들은 인어공주를 구하기 위해 마녀에게 머리카락을 팔아 마법의 칼을 얻어온다. 이 칼로 왕자의 심장을 찌르면, 인어공주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며, 언니들은 인어공주를 반드시 살려내려 한다.

인어공주는 허리를 굽혀 왕자의 아름다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장밋빛으로 점차 밝아 오는 하늘과 날카로운 칼을 번갈아 보았다. 왕자가 꿈속에서 신부의 이름을 불렀다. 왕자는 잠결에도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칼을 쥔 인어공주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인어공주는 칼을 멀리 바다 속으로 던져 버렸다.


인어공주는 왕자와의 결혼뿐 아니라 인어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불멸의 영혼’을 원했다. 하지만 결국 불멸의 영혼보다 더 아름다운 어떤 것을 얻은 것이 아닐까. 첫째, 인어공주는 신분은 물론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의 경계마저도 뛰어넘는 불멸의 사랑을 했다. 둘째, 인어공주는 극한의 고통 앞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증언한다. 인어공주는 인간의 다리를 얻기 위해 마녀에게 혀를 뽑히고, 그것도 모자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칼로 다리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고통을 느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왕자를 죽이면 자신이 살아날 수 있는데도, 다른 여자와 신혼 첫날밤을 보내고 행복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왕자의 심장을 차마 찌르지 못한다. 사람들은 ‘바보 같은 선택’이라고 비난할지라도, 인어공주는 자신의 사랑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셋째, 인어공주는 불멸의 영혼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의 눈부신 용기’를 보여주었다.현대인의 시선으로 본 인어공주는 어쩌면 너무 미련하고, 순진하고,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인어공주의 용기가 눈물겹다. 그녀는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운명보다 앞서 떨쳐 나아갔고, 운명의 장애물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사랑 앞에서 한없이 계산하고, ‘혹시나 내가 손해보지 않을까’하고 전전긍긍하는 문명인들과 달리, 인어공주는 마지막까지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이 행복할까’를 생각하고 자기 사랑의 아름다운 마지막을 신이나 마녀의 도움이 아닌 스스로의 손으로 장식했다. 나는 인어공주를 통해 자신을 가로막은 수많은 경계를 뛰어넘어 그 모든 장애물을 해체하는 ‘존재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본다.

사보<화폐와 행복> 7+8월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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