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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SCO 이야기/화폐와 행복(사보)

테마무비

by 한국조폐공사 2019. 1. 23.

세상의 변화를 맞이하는 자세

<레디 플레이어 원>과 <소공녀>


이상헌 / 영화칼럼니스트

 

 “거짓말 같다.”라는 표현은 다음 두가지 상황에서 사용한다. 어떤 것이 진실이 아니거나,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때.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흐른다. 어김없이 한 해가 가고, 거짓말처럼 새해가 찾아왔다. 지난 삶이 아쉬웠든지 충만했든지 간에 이맘때에는 누구나 새롭게 다짐하고 더 단단히 마음을 먹는다. 이번 호에서는 2018년에 눈여겨본 영화들 중 두 편을 골라, 변화무쌍한 미래와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소개할 두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과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다. 


성공한 덕후가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


2045년,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속의 세상은 두 개로 갈라져 있다. 식량 파동과 인터넷 대역폭 폭동으로 모두가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현실 세계와, ‘오아시스’라 불리는 가상 세계. 세상 사람들은 힘든 현실을 잊고 모든 것이 가능한 오아시스에 접속해 시간을 보낸다. 오아시스의 설계자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 분)는 죽기 전 자신이 숨겨둔 ‘이스터 에그’를 가장 먼저 찾는 자에게 5,000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오아시스의 소유권을 넘기겠다는 유언을 남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성공한 덕후’의 이야기다. 이 말은 극중 오아시스를 구축한 제임스 할리데이나, 그 오아시스에서 출중한 게임 실력을 발휘하는 주인공 웨이드 와츠(타이 쉐리던 분) 모두에게 해당된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성공한 영화 덕후 스티븐 스필버그에 의한, 그를 위한 영화다. 그가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모조리 담아냈다. 영화는 주인공 소년과 친구들의 모험, 악당과의 대결, 우정과 사랑을 기반으로 한 성장담 등 할리우드의 드라마 문법에 충실히 따른다. 여기에 한 시절을 풍미한 대중문화의 아이콘들, <빽 투 더 퓨쳐>, <아키라>, <아이언 자이언트>, <킹콩>과 <쥬라기 공원> 그리고 <샤이닝> 등 오만가지 레퍼런스가 거의 모든 장면마다 등장한다.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도 즐겁다. 자신이 알고 있는 캐릭터, 아이템, 상징이 나오는 장면에선 더욱 반갑게 느껴지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영화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찾는 재미가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지난해에만 두 편의 영화(<더 포스트>, <레디 플레이어 원>)를 만들어 낸 스필버그의 가공할 만한 창작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체력보다도 더 존경스러운 것은 그가 가진 무궁무진한 호기심이다. 그에겐 과거도, 미래도 모두 미지의 영역이다. 그가 연출한 영화의 제목처럼 ‘미지와의 조우’를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면하려는 그의 태도가 <더 포스트>와 <레디 플레이어 원>을 만든 원동력이 됐다(어디 이 두 편뿐일까). 과거(이야기)와 미래(세대와 테크놀로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자신의 생각과 상상력을 매개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도 꾸준히 성장한다. 이것이 ‘완성형의 감독’ 스필버그를 지금의 자리로 올려놓은 비결이 아닐까. 새로운 경험을 통해 동시대와 소통하고 덕분에 언제나 시대의 첨단을 걷는 감독. 현실과 가상 세계를 아우르는 ‘낯선 세계’를 구현한 <레디 플레이어 원>은 그래서 연신 감탄사를 내뱉게 되는 작품이다.


집은 없지만, 품위 있는 그녀 <소공녀>




여기 또 한 명의 덕후가 있다. 위스키와 담배를 사랑하는 여자 ‘미소’(이솜 분)는 그 둘과 남자친구(안재홍 분)만 있다면 그 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실 미소에겐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 장롱도, 책상도 없는 비좁은 단칸방에서 살지만 그마저도 한겨울에 보일러를 틀 수 없어 오들오들 떤다. 새해가 되자 월세는 오르고, 담뱃값도 올랐다. 가계부를 보던 미소는 결심한다. 위스키와 담배는 포기할 수 없으니 집을 포기하겠다고. 


하지만 묘한 일이다. 미소는 집도 없이 그렇게 가난하지만 전혀 비루해 보이지 않고, 극중 대사처럼 “스탠다드(standard)는 아니지만” 참 멋지게 그려진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숨기지 않고 돈의 유무와 관계없이 자신의 모습에 당당하다. 그간 충무로에서 볼 수 없었던 유니크한 캐릭터가 탄생한 셈인데, 아마도 ‘충무로’가 아니라 ‘광화문’(시네마)에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 다른 캐릭터들과의 대비는 미소의 기품을 더욱 높인다. 집을 나선 미소는 옛 밴드 멤버들의 집을 하루씩, 또는 며칠씩 찾아가서 지낸다. 집집마다 그렇고 그런 사연이 있다. 링거를 맞아야 하루를 견디는 직장인 친구, 며느리보다는 거의 식모에 가까운 친구가 있는가 하면, 술과 우울에 찌든 이혼남은 매일 밤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재력가 남편과 결혼한 친구는 남편의 행동 하나하나에 쩔쩔매는 ‘을’로 살아간다. 집은 있으나 오히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


불안한 세상에서 ‘안정’이라는 것만큼 ‘환상적’인 단어가 또 있을까. 우리는 변화무쌍한 현실에서 안정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가진 돈은 소박한데 한 번 오른 집값은 쉬이 내려올 생각을 않는다. 그래서 미소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히 하루의 행복을 선택한다. 미소에게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모금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하다. 세상이 춥더라도 마음의 온기, 자존(自尊)을 잃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미소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온다. 그 삶의 형태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미소의 태도는 다르지 않다.


스필버그가 <레디 플레이어 원>을 찍는 최첨단의 시대인 동시에 <소공녀> 속 미소처럼 비(非)정상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대다. 각양각색의 영화와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큼이나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사람들의 삶의 색깔은 다채로워진다. 변화는 사회의 통념을 깨뜨리고 개인에게는 생각의 지평을 넓히기를 요구한다. 그럴 때 영화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목도할 수 있는 좋은 매개가 된다. 새해에도 갖가지 영화들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보고 또 보고, 곱씹어 보면 영화는 때때로 책보다 더 좋은 마음의 양식이 된다.


사보 『화폐와 행복 2019. 1+2월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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