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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SCO 이야기/화폐와 행복(사보)

평생 사과를 그린 화가, 폴 세잔

by 한국조폐공사 2021. 1. 25.

KOMSCO CULTURE_그림보고 화가 읽기 ⑦

평생 사과를 그린 화가, 폴 세잔

 

인류 역사를 바꾼 유명한 ‘사과’들이 있다. 이브의 사과부터 뉴턴의 사과, 세잔의 사과, 그리고 잡스의 애플까지. 다른 건 몰라도 세잔의 사과는 언뜻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화가가 그린 사과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는 건지 말이다. 폴 세잔(Paul Cezanne)은 일찌감치 사과에 대한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라며 무려 40년동안 사과를 그렸고, 결국 미술의 역사를 바꿨다. 미술사는 그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부른다. 세잔은 왜 하필 사과를 선택한 걸까? 평범해 보이는 그의 사과 그림은 도대체 왜 위대한 걸까?  

세잔은 1839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화가를 꿈꾼 모험심 강한 소년이었지만 고압적인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사생아라는 정체성 때문에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대에 진학했으나, 곧 그만두고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인정받는 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20대 중반부터 살롱전에 계속 출품했지만 늘 보기 좋게 떨어졌다. 18년의 도전 끝에 43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살롱전dmf 통과했고, 56세때야 첫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전 이듬해인 1896년엔 인상파 동료들과 결별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주류 미술계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후원자도 없었지만 세잔은 끝까지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산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르는 후배 화가들이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실패한 화가’이자 ‘예리하지 못한 눈을 가진 시골 화가’라는 자괴감 속에 살았다. 

사과는 완벽한 모델
세잔은 자신의 부족함을 관찰 노력으로 채우고자 했다. 그가 사과를 그림의 주제로 선택한 건 쉽게 썩지 않아 오래 관찰할 수 있고, 구하기도 쉽고,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도 말 한마디 않는 조용하고 완벽한 모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초상화를 그릴 때도 모델을 백 번도 넘게 불러 사과처럼 앉아있게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의 첫 개인전을 열어주었던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를 그릴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모델을 서던 볼라르가 실수로 잠이 들자, 세잔은 화가 나서 호통쳤다. “인마! 자세가 엉망이 됐잖아! 농담이 아니라, 정말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사과가 움직여?” 결국 볼라르의 초상화는 미완성으로 끝났다. 한번은 다른 모델이 몸을 돌려 크게 웃자 화를 벌컥 내며 붓을 내팽개치고 뛰쳐나간 적도 있었다. 
동료 화가인 에두아르 마네는 생기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모델들에게 웃고, 말하고 움직일 것을 권했다. 모델의 기분이나 개성이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해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반면 세잔은 모델에게 표정도 움직임도 없이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요구하니 모델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까탈스러운 화가의 요구를 완벽하게 들어줄 모델은 사과밖에 없었다. 세잔이 40년 동안이나 사과를 그리고 또 그린 이유다.

사과와 오렌지, 1899년경 Paul Cezanne, Apples and Oranges


진짜 사과를 그리고 싶다
세잔이 60세에 그린 ‘사과와 오렌지’는 그의 말년 대표작이자 사과 정물화 중 가장 유명하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한 화면 안에 다양한 시점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물을 한 각도에서 본 것이 아니라 위, 앞, 옆에서 각각 본 시점을 한 화면 안에 그려 넣었다. 높이 솟은 중앙의 과일 그릇과 쏟아질 것 같은 불안한 왼쪽의 과일 접시, 오른쪽 물병 주변의 과일들 모두 시점이 다르다. 각각 다른 각도에서 바라봤지만 정물들은 나름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배치돼 있다. 복잡한 문양의 소파와 천, 그 위에 놓인 심하게 구겨진 흰색 천, 하얀 접시와 꽃무늬 물병도 사과와의 조화를 위해 화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림 속 주인공인 사과들은 먹을 순 없지만 단단하고 매력적이다. “나는 순간의 사과가 아니라 진짜 사과를 그리고 싶다”는 고백처럼 세잔은 사과가 가진 모든 빛깔, 형태, 변화를 한 화면 안에 진실되고 조화롭게 담고자 했다. 그것이 사과의 본질이자 진짜 모습이라 믿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나는 자연에서 원통, 구, 그리고 원뿔을 본다”고 주장했다. 
자연을 기하학적 형태로 재해석한 세잔의 눈은 사실 이전까지 그 어떤 예술가도 갖지 못했던 것이었다. 대상을 단순화하고 여러 각도에서 본 사물을 한 화면 안에 재구성하는 그의 시도 역시 서양미술의 오랜 규범과 전통을 깨는 것이었다. 카메라처럼 한 시점에서 바라본 대상을 원근법대로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당연하던 시대에 이렇게 복수 시점으로 단순화해서 그린 그림은 당시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이해는 커녕 조롱의 대상이 됐다. 

대수욕도,1898~1905년 The Large Bathers


세잔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
세잔은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의 흥미를 끄는 주제들을 반복적으로 그리곤 했는데, 말년에는 ‘목욕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 연작을 제작했다. 사과 정물화처럼 과감하게 단순화한 인물과 풍경을 한 화면 안에 조화롭게 배치한 그림이었다. 그중 가장 큰 그림이자 죽기 전까지 7년을 매달렸던 ‘대수욕도’(1898~1905)는 입체파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그림을 본 파블로 피카소는 2년 후 최초의 입체파 그림인 ‘아비뇽의 아가씨’를 탄생시켰다.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를 이끌었던 조르주 브라크 역시 “세잔의 작품을 발견하자 모든 것이 뒤집혔다. 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며 세잔의 예술을 칭송했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평생의 라이벌이었지만 입을 모아 말한다. “세잔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후대 화가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화가야말로 진정으로 성공한 예술가가 아닐까. 스스로는 실패한 화가로 평생 자괴감을 안고 살았지만, 미술사는 그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부른다. 사과라는 일상의 무미건조한 주제를 위대한 미술의 세계로 끌어올린 세잔. 그만의 예리한 눈과 오랜 관찰의 성실함은 현대미술을 향한 새로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문의 열쇠가 바로 사과였던 것이다. 세잔의 사과는 그래서 위대하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런던 소더비 예술대학원에서 현대미술학을 전공한 후 맨체스터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대학과 기업체, 미술관에서 강의하며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현재 KBS 라디오 <문화공감>에 출연 중이며, 동아일보 칼럼 <이은화의 미술시간>을 연재 중이다. 『가고 싶은 유럽의 현대미술관』 『자연미술관을 걷다』 등 13권을 저서를 출간했다. 

사보 『화폐와 행복』 1+2월호(2021년) 52-52p 게재

※사보 『화폐와 행복』에 게재된 글들은 각 필자 개인의 의견을 반영한 것으로 한국조폐공사의 공식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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