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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SCO 이야기/화폐와 행복(사보)

동백꽃처럼 봄날 '툭' 떨어진 비운의 여인 비올레타

by 한국조폐공사 2021. 3. 15.

KOMSCO CULTURE_조희창의 클래식 읽기 ②

 

동백꽃처럼 봄날 '툭' 떨어진 비운의 여인 비올레타

-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椿姬)>

글 조희창(음악평론가)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그 꽃, 말이에요….”

송창식의 노래 <선운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봄은 동백꽃과 함께 온다. 하지만 벚꽃이나 개나리처럼 봄을 함께 하지 못하고 봄바람이 불어오면 동백은 이별을 준비한다. 동백은 봄의 옷자락을 잡고 흐느끼지 조차 않는다. 그저 ‘툭’하고 떨어질 뿐이다. 봄의 전령사라기보다는 봄의 순교자 같다. 
서양에서도 동백은 불타는 사랑의 상징이다. 프랑스의 명품 샤넬의 상징도 ‘까멜리아’(camelia), 동백꽃이다. 그리고 베르디의 걸작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원작도 알렉산더 뒤마 피스의 소설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elias)이었다. 그래서 이 오페라를 한자식으로는 <춘희>(椿姬), 즉 ‘동백 아가씨’라고 부른다. <춘희>는 한국에서 한국 오페라단에 의해 정식으로 공연된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1948년 1월 서울의 부민관에서 상연됐으며, 당시의 여주인공 비올레타 역은 소프라노 김자경이었다.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

 

스물두 살, 너무나 짧았던 그녀의 여름날

<라 트라비아타>의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베르디는 명실상부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부이며, 전 세계 공연장에서 여전히 가장 사랑받는 작곡가이다. 베르디의 오페라를 감상하기 위해선 먼저 그 시대 상황을 들여다봐야 한다. 과거의 이탈리아는 지금과 같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여러 공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베르디가 살던 시대에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침략이 너무 거세져서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1831년에 이탈리아 정치지도자 마치니가 청년 이탈리아당을 조직하고, 1834년에 피에몬테 폭동이 일어나며, 1843년에 가리발디가 ‘붉은 셔츠단’을 만들어 시칠리아 해방운동을 전개하고, 1847년에 카부르가 《일 리소르지멘토》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강력한 정치 활동을 시작하던 그 시대에 바로 베르디의 오페라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베르디는 1842년의 오페라 <나부코>부터 시작해서 <레냐노 전투> <에르나니> 등의 애국적인 오페라로 유명해졌고, 이탈리아의 자유와 통일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1850년경부터 그의 작품 세계에 변화가 일어난다. 베르디는 첫 번째 부인을 병으로 잃고, 두 번째 여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를 만났다. 그러나 보수적인 가족과 고향 사람들은 이 여인의 과거 연애사를 들추며 연일 험담을 이어갔다. 베르디는 결국 집안과의 인연을 끊고 스트레포니와의 사랑을 택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이탈리아 통일운동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통념과 도덕적 인습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을 깊이 생각하게 됐다. 그때부터 그는 애국주의를 넘어 사회적 약자에 관한 이야기를 작품에 담기 시작한다. 꼽추로 태어나 성격이 비틀린 광대, 무시되고 억압당하는 집시, 그리고 남자들에게 이용당하는 창녀에 대한 오페라가 태어난다. 베르디 중기의 3대 명작이라 불리는 <리골레토> <일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가 그것이다. 이 오페라로 베르디의 명성은 하늘까지 치솟았다. 
<라 트라비아타>는 1853년에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됐다. 원작 소설가인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는 파리 사교계를 돌아다니다가 마리 뒤플레시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그렇지만 이 여인은 그를 떠나 돈 많은 백작에게 갔는데, 얼마 안 가서 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동백꽃 여인>이라는 소설을 썼고, 이 소설을 토대로 <라 트라비아타>의 대본이 만들어졌다. 

라 트라비아타 대본집

“이상하고 신비한 기쁨과 고통!”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는 ‘길을 잘못 든 여인’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미모를 남자의 돈과 바꾸며 살아가는 여인 비올레타(소프라노)는 화려한 파티와 동백꽃 선물을 좋아했다. 그녀에겐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는 언제나 자유롭게 살며 순간을 후회 없이 즐기는 것이고, 두 번째는 즐기되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프랑스에서 올라온 부잣집 아들 알프레도(테너)의 정열적인 고백에 마음이 흔들려 동거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1막의 이야기다. 
2막에선 아들이 화류계의 여인과 함께 산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제르몽(바리톤)이 파리로 와서 비올레타에게 아들과 헤어지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부탁에 마음이 약해진 비올레타는 편지를 써놓고 알프레도의 곁을 떠나지만, 사정을 잘 모르는 알프레도는 배신감에 사로잡혀 그녀에게 모욕적인 말을 퍼붓는다. 그리고 3막이 되면 비올레타는 사교계를 떠나서 홀로 폐병과 외로움에 신음한다.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알프레도가 비올레타를 찾아오지만 이미 병이 깊어진 비올레타는 연인의 팔 위에서 숨을 거둔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자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지만 베르디 당시에는 가히 혁명적인 이야기였다. 파리 사교계의 위선적인 모습, 부자들의 이기심, ‘코르티잔’이라 불리던 사교계 여인의 실상 등 숨기고 싶은 사회상이 오페라 무대에 턱 하니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거장 베르디의 음악은 어느 한 곳도 버릴 데가 없다. 강렬한 서곡과 관현악적 효과에다 <축배의 노래> <프로벤차 내 고향> <파리를 떠나서> 등의 멋진 독창, 이중창, 합창이 듣는 이를 진하게 압도한다. 
이 중에서 입문용으로 두 곡만 추천하고 싶다. 우선 1막에 나오는 비올레타의 절창 <언제나 자유롭게>(sempre libera)는 소프라노의 기교를 만끽할 수 있는 곡으로 유명하다. 자유롭게 즐기며 살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랑에 흔들리는 마음을 표현한다. 3막의 후반부에서 비올레타가 부르는 <안녕 지난날이여>(Addio, del passato)는 비통하기 짝이 없는 탄식가다. 병상에 누운 비올레타는 이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곧 당신에게 가겠다는 알프레도의 편지를 받는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이미 늦었음을 알고 있다. 화려한 모든 시절은 가버렸으며, 모든 꿈은 끝났다. 너무나 짧았던 봄날, 동백꽃 떨어지듯이 그녀는 떠났다.

200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이다. 이제껏 발매된 모든 <라트라비아타> 영상물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DVD이며 당연히 한글 자막본이 출시됐다. 

청중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던 풋풋한 시절의 안나 네트렙코와 롤란도 비야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빌리 데커의 미니멀한 무대 연출로도 화제가 됐다.

조희창 (음악평론가) │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대전예술의 전당 외 문화예술회관, 기업에서 공연해설 및 클래식 음악 강의를 하고 있다. 소니뮤직 클래식 담당, KBS 1FM 작가, KBS 1TV <클래식 오디세이> 대표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월간<객석> 기자, 월간 <그라모폰 코리아> 편집장 <윤이상평화재단> 기획실장, 예술경영지원센터 공연예술행사 음악분야 평가위원 역임하고 있다. 저서로는 ‘클래식 내비게이터’, ‘베토벤의 커피’ 등이 있다.

사보 『화폐와 행복』(2021) 3+4월호 43-44p

 

※ 본지에 실린 글들은 각 필자 개인의 의견을 반영한 것으로 한국조폐공사의 공식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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