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는 왜 빚에 쪼들렸을까
-그를 평생 마음 졸이게 한 ‘돈’과 ‘사랑’
에펠탑이 건너다보이는 센강 왼쪽의 파리 16구 언덕배기. 지하철 파시 역에서 내려 오르막길로 조금 가다 왼쪽으로 꺾으면 ‘발자크의 집’이 나온다. 레이누아르 거리 47번지. 그가 인생 최대 고비인 마흔한 살 때부터 죽기 3년 전인 마흔아홉 살 때까지 8년간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필생의 대작 《인간희극》 시리즈를 썼다.
큰길에서 내려다보이는 발자크의 집은 고즈넉하다. 높은 건물들 사이에 끌로 쪼아낸 듯 푹 꺼진 자리에 있는 목조주택. 떡갈나무로 만든 덧문마다 투명한 녹색 페인트칠이 정갈하게 돼 있다.
자세히 보면 집의 출입문이 두 개다. 대문 외에 센강 쪽의 아래편 좁은 골목으로 문이 하나 더 있다. 서쪽에서 보면 단층집이지만 동쪽에서 보면 3층집 같다. 그가 빚쟁이들로부터 쉽게 도망치기 위해 이런 집을 구했다는 말이 그럴 듯해 보인다.
그가 빚더미에 앉게 된 것은 잇따른 사업 실패 때문이었다. 20대 중반부터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보려고 출판업, 활자 인쇄업, 광산업, 가구업 등 닥치는 대로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모두 말아먹었다.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후에도 돈에 쪼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피해 그는 하녀의 도움을 받아 뒷문으로 도망치곤 했다.
29세 때인 1828년 기록에도 ‘12만 5000프랑의 빚을 갚기 위해 내 펜밖에는 의지할 데가 없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생활비를 벌고 빚을 갚기 위해 그는 밤낮없이 글을 써야 했다. 하루 14시간은 기본이고 16시간 이상 원고지와 씨름하는 날도 많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오후 6시에 잤다가 자정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그때부터 정오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인간희극》의 초반부를 쓸 무렵에는 커피 없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일생 동안 그가 잠을 쫓기 위해 마신 커피가 5만 잔이라고 한다. 하루 40~50잔씩 마셨다니 그럴 만하다. 국내 커피 광고에도 등장했지만, 그는 원고지를 잉크가 아니라 커피로 채운 사람이었다.
그렇게 전력투구한 결과 90편의 장편과 중편, 30편의 단편, 5편의 희곡 등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겼다. 그것도 20여 년 만에 일군 업적이었다. 하지만 빚쟁이들의 시달림 속에서도 작품의 저작권만큼은 절대 팔려고 하지 않았다니 더욱 안쓰럽다.
발자크 집 정원에 그의 조각상이 있다. 지금도 빚에 쪼들리는지 찌푸린 표정으로 머리에 푸른 이끼를 덮어쓴 채 외로이 서 있다. 몽파르나스 부근의 라스파이유 거리에 있는 잠옷 차림의 발자크 동상을 떠올리게 한다. 로댕의 걸작 중 걸작인데 하필이면 잠옷이라… 하루 종일 원고에 쫓겨 글만 쓰고 외출할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까. 그가 인쇄기를 설치했다가 쓰라린 실패를 겪었던 비스콘티 거리 17번지와 파리 북쪽 페르 라셰즈 묘지에도 그의 아픈 상흔이 새겨져 있다.
그의 사랑도 늘 갈급하고 안타까웠다. 서른세 살 때인 1832년 어느 날 국제우편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외국 여인으로부터’라는 서명만 있을 뿐 주소도 없고 발신자 이름도 없었다. 소인을 보니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온 것이었다. 프랑스어로 편지를 쓴 걸로 보아 귀족 부인인 것 같았다. 그러나 답장을 보낼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9개월 뒤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그녀는 자신의 편지가 제대로 전달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신문에 짤막한 광고를 내달라고 했다. 그는 7프랑 50상팀을 들여 신문광고로 답장을 냈다. 이후 둘 사이에는 가슴 뛰는 러브 레터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바로 발자크를 평생 가슴 졸이게 만든 러시아의 백작 부인 한스카였다.
얼마 뒤 그녀는 늙은 남편을 졸라 프랑스 국경에 접한 스위스 도시 뇌샤텔로 요양 겸 여행길에 올랐다. 속셈은 상상 속의 ‘멋진 작가’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발자크는 그들의 호텔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았다. 한스카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그리던 유명 작가가 배불뚝이에 짜리몽땅한 체구여서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백작의 눈을 피해가며 짜릿한 나날을 보냈다. 한 달간의 꿈같은 시간도 잠깐, 산더미처럼 밀린 일 때문에 그는 파리로 돌아와야 했다. 오, 지리멸렬한 파리의 날들…
크리스마스가 되자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한스카 부인 일행이 머무는 곳으로 달려갔고 거기서 또 황홀한 40여 일을 보냈다. 그녀가 돌아가고, 그 또한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두 가지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한스카 부인과 결혼하는 일과 야심작 《인간희극》을 10년 안에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날마다 연인에게 편지를 썼다. 《인간희극》의 전체 구상을 밝힌 것도 그 편지에서였다. 그가 매일 편지를 쓰던 나무 책상이 서재 한쪽에 높여 있다. 한스카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비참한 생활을 나와 함께 했고 내 눈물을 닦아줬고 내 모든 생각을 들어줬으며 내 팔이 항상 그 위에 있었고 내가 글을 쓸 때 함께 명상했다’고 묘사했던 바로 그 책상이다.
너무나 평범해서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 나무 책상. 별로 크지도 않고 높지도 않으며 특별한 장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말없는 책상 하나가 갖는 의미는 예사롭지 않다. 리얼리즘의 선구자라는 명성과 함께 고통의 가시밭길을 맨살로 관통했던 작가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일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기 때문이다.
한스카 부인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 그때 결혼하자”고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백작이 죽은 뒤에도 그녀의 결혼 승낙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3년 째 되던 해 7월,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던 그녀를 만나러 달려갔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연인은 하나뿐인 딸 안나를 시집보낸 후에 결혼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3년 뒤 안나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마음을 잡지 못했다.
이듬해 가을이 되자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급행마차를 탔다. 그녀의 저택에서 생애 가장 행복한 4개월을 보냈지만 이내 빚 때문에 돌아와야 했다. 1848년 2월 혁명의 혼란 속에서 다시 찾아갔을 때에도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괴롭고 고통스런 날들이었다.
그러던 1850년 3월, 그녀가 드디어 결혼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18년간을 애타게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행복했고 신에게 진심으로 감사기도를 드렸으며 러시아의 아름다운 귀족 부인을 동반하고 파리로 금의환향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잔인했다. 그의 건강은 회복불능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루 열대여섯 시간씩 집필에 매달리면서 사랑에 대한 갈급증으로 온몸의 에너지를 소진해버린 탓일까. 그렇게도 원하던 연인과 결혼에 성공한 지 넉 달 만에 그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가 죽기 직전 문병 왔던 빅토르 위고의 회상이 아릿하다. ‘나는 그 방에서 내려왔다. 그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리며. 거실을 지나면서 나는 희미한 빛을 받으며 우뚝 솟아있는 그의 태연한 모습의 흉상을 발견했다.’
바로 그 흉상이 그의 집필실 벽에 지금도 그대로 있다. 그가 남긴 《인간희극》은 단테의 《신곡》에 필적할 작품을 내놓겠다는 야심으로 빚어낸 명작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만에 나온 결정판 24권에는 총 2472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주요 인물만 566명에 이른다.
1부 《풍속연구》, 2부 《철학적 연구》, 3부 《분석적 연구》로 구성된 이 작품에는 1810년부터 1835년까지의 복고 왕정을 배경으로 한 온갖 유형의 인간 군상과 사회 풍속도가 그려져 있다.
그가 서문에서 “프랑스 사회가 역사가가 될 것이며 나는 그저 그 비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 것처럼 출세욕에 사로잡힌 남자, 돈에 눈 먼 수전노, 범죄자, 농민 등 다양한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평생 돈과 사랑에 목말랐던 대문호의 삶은 고달팠으나 그의 작품은 이렇게 남아 세세천년을 등불처럼 비춘다. 그가 빚에 쪼들리지 않았다면 이렇게 방대한 양의 역작을 남길 수 있었을까. 사랑의 갈증으로 18년을 애태우지 않았다면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그의 집을 찾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는 가운데 빈 집에 남은 책상과 뒷문과 조각상은 말없는 그림자만 길게 드리우고 있다.
출처 : 화폐와 행복 2017 9+10 『문학산책_발자크는 왜 빚에 쪼들렸을까』
글 : 고두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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