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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SCO 이야기/화폐와 행복(사보)

여행칼럼 - 꽃피는 문경

by 한국조폐공사 2016. 5. 17.

 

석탄을 캐내던 은성탄좌가 번성하던 시절,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 소리가 회자될 정도로 문경은 잘 나가던 고장이었다. 실제로 70~80년대 문경에서 집 한 채를 팔면 서울에 두 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집값과 땅값이 하늘을 찔렀었다. 하지만 2016년 현재 문경시의 인구는 7만6000명으로 겨우 도시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다. 탄을 실어 낸 짐칸에 돈을 싣고 들어오던 열차의 자취는 끊기고, 선로 위에는 찬란하게 피어난 봄꽃들 사이로 레일바이크가 달리고 있다. 한 때 가은읍 지하를 거미줄처럼 파내려간 갱도의 길이는 420km. 전국에서 몰려든 광부들이 지하 800m의 막장으로 내려가 탄가루를 마시며 석탄을 캐내던 문경은 이미 탄가루의 땟국물을 씻어낸 지 오래다. 탄가루가 섞여 먹물 같은 물이 흐르던 하천에는 수정 같이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제 광부들의 발길로 북적이던 자리에는 표고, 오미자, 사과밭과 도자기를 빚어내는 가마들이 들어섰다. 노란 산수유 꽃이 지고, 벚꽃 잎이 바람에 날리고 있는 문경의 산하를 둘러보고 왔다.

 

 

문경새재


몇 해 전 새재를 찾았을 때는 가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봄의 새재를 보러 왔다. 백두대간의 일부인 조령산을 넘는 새재는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길목 중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군사요충이었다. 새재라는 이름의 유래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혹은 ‘억새가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새), 새로(新) 난 고개에서 유래했다는 등 설이 분분하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천혜의 요새인 이곳을 버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뒤에 왜군에게 전멸을 당한 후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147호)을 설치되는 등 국방의 요새로 자리매김했다.


문경새재 1관문에서 3관문까지 구간 사이에는 경관이 빼어나고 설화 등 풍부한 이야기가 깃든 유적들이 널려있다.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임무를 교대하는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받았다는 교귀정이 있다. 교귀정 위쪽에는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에 ‘산불됴심’이라고 새겨진 비석(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이 남아 있어 지나가는 객들의 눈길을 끈다. 문경새재는 1974년 지방기념물 (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됐고, 2015년에는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우리 국민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관광의 별’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밖에 새재를 넘던 나그네들과 관헌들이 쉬어가던 원터 등이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새재관문 근처에는 진달래가 만개해 오가는 봄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다.

 

가는 길
•대전에서 가려면 l 경부고속도로 → 남이분기점 → 중부고속도로 → 증평IC → 34번국도 → 괴산 → 연풍 → 이화령터널 → 문경새재도립공원
•서울에서 가려면 l 중부고속도로 → 호법분기점 → 영동고속도로 → 여주분기점 → 중부내륙고속도로 → 문경새재IC → 문경새재도립공원

 

 

문경새재주흘관

 

 

새재 진달래

 

 

물이 맑은 선유동


새재로 알려진 문경이지만, 자연경관으로 따지자면 선유동과 대야산을 빼놓을 수 없다. 용추와 선유동은 하나로 연결된 계곡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용추에 가려면 먼저 선유동을 거쳐야 한다.


점촌~문경간 국도(3호선)변의 마성면사무소(소야교) 앞에서 가은·농암 방면으로 10여km를 가면 가은 읍내를 지나게 된다. 여기서 석탄박물관 쪽(청주·괴산방면)으로 8km쯤 더 가면 가은읍 완장리 마을회관이 나타난다. 여기서 2km정도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도로변 좌측에 1,000여 평 규모의 주차장이 보인다. 주차장 옆 송림이 우거진 경사진 도로가 있는데 이곳이 선유동계곡의 입구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에 걸쳐 선유동이라는 계곡이 여러 곳 있다.
하지만 기자가 가 본 선유동 중에서는 문경 선유동이 으뜸이다. 이 곳 선유동계곡은 길이가 2km에 달하는데,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펼쳐진 암반의 색깔이 여인의 속살처럼 뽀얗다.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들은 마치 대리석을 다듬어 뉘어 놓은 듯 편평하다. 하얀 암반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 사이로 수정보다 더 맑은 옥계수가 사계절 쉬지 않고 흐르는 경치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다.


경관이 아름다운 만큼 선유동은 예로부터 소금강이라고 불렸다. 계곡의 물도 맑고 수량도 엄청나다. 대야산의 또 다른 이름이 대하산(大河山)인 것만 봐도 이 산의 수량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선유동을 아우르는 대야산이 한국의 비경 100선과 한국의 명수(名水) 100선으로 선정됐다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질 따름이다. 신라의 석학 고운 최치원도 “선유동계곡이 합천 해인사 계곡인 홍유동 계곡보다 좋다”며 이곳에서 머물렀을 정도다.


선유계곡 관란담 위에는 손재 남한조가 정자를 짓고 글을 가르쳤다는 옥하정터가 있고 도암 이재는 용추동에 둔산정사를 짓고 후진을 양성했다. 지금의 학천정은 바로 도암선생을 추모하는 후학들이 그의 위덕을 기려 1906년에 세웠으며 오른쪽에 조그마한 건물 한 칸이 있어 도암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정자와 주변경관이 조화를 잘 이룬 절경지로, 정자 뒤 거대한 암벽에는 산고수장이라는 힘찬 필지의 글이 새겨져 있다.


선유동 하류쪽 관란담 위에 서 있는 칠우정은 1927년 이 고장 출신 우은, 우석 등 우字 호를 가진 일곱 사람이 뜻을 모아 세운 정자로 정자이름은 의친왕이 붙여준 것이라 전해온다. 학천정 앞 바위에는 선유동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석각 글씨는 모두 최치원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가는 길
•서울에서 가려면 l 중부고속도로 → 호법분기점 → 영동고속도로 → 여주분기점 → 중부내륙고속도로 → 문경새재IC → 가은읍 선유동계곡

 

 


대야산 용추


선유동 입구에서 922번 지방도로를 따라 600m쯤 올라가면 관광안내판이 있고, 이곳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벌바위 마을이 나온다. 벌바위란 마을 뒷산의 바위들이 벌집 같다고 해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길을 따라 800m쯤 올라가면 돌마당 휴게소가 있고, 휴게소입구 오른쪽 언덕에는 넓은 바위가 있는데 마당처럼 넓다고 해서 ‘마당바위’라고 불린다. 휴게소 앞 다리를 건너면 용추까지 이어지는 임도가 있지만, 이 길 대신 오른쪽 산길을 이용해도 용추에 갈 수 있다. 임도로 가면 폭포의 왼쪽으로, 산길로 가면 폭포의 오른쪽에 닿는다.


기자가 이곳을 처음 찾은 35년 전에는 용추까지 가는데도 풀 섶을 헤치며 간신히 접근했었다. 가는 도중에 만난 꺼병이(꿩새끼)들은 기자를 보고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시의 대야산은 그야말로 때 묻지 않은 원시 자연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용추 바로 아래까지 펜션, 민박집과 식당들이 들어서 있다. ‘비경의 처녀림’이 은둔을 희생한 대가로 받은 전리품들인 셈이다.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있는 대야산(大耶山 930.7m)은 충북 괴산군과 경북 문경시를 경계 짓는 산이다. 소백산맥의 비경을 간직한 채 오랫동안 숨어 있던 아름다운 산인데, 정상에 이를 때까지 수량이 풍부해 대하산(大河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산허리까지는 암반계류에 흙길이 어우러진 절경이 펼쳐지는데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암봉과 온갖 형상의 기암괴석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야산 자락의 비경은 한 둘이 아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2단으로 이뤄진 용추폭포야 말로 비경중의 비경이 아닐 수 없다. 암수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오른 곳이라는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용추 양쪽 화강암 바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을 할 때 용트림 하다 남긴 비늘 흔적이라는 무늬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게다가 이곳의 물은 마르는 일이 없어 옛날부터 극심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올렸다고 한다.


용추는 위 아래로 나뉘는 두개의 폭포로 이어져 있으며 수만 년 기나긴 세월을 쉼 없이 흘러내려 떨어지는 폭포 아래에 하트 모양으로 깊게 파인 윗 용추가 있다.
위 용추에서 머물던 물이 매끈한 암반을 흘러내려 부드럽게 이루어 놓은 아래 용추로 이어진다. 용추는 두 곳 모두 수정 같은 물빛이 아름답지만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된다. 폭포로 쏟아지는 물길이 거센데다 휘감아 도는 까닭에 수영에 능숙한 사람이라도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이곳에서 심심치 않게 익사자가 나오는 이유다. 시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용추 주변에 펜스를 쳐 놓고, 물에 빠진 사람이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도록 노란 구명줄을 걸쳐 놓았다. 하지만 이 모습이 용추의 풍광을 해치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망댕이가마

 


영남요(嶺南窯)


영남요는 250여 년 9대째 조선 도자 가업을 이어온 김정옥(76)씨가 그릇을 빚고 있는 터전이다.


김정옥 명인은 “영남요를 대표하는 작품은 달항아리인데 작품이 워낙 크다 보니 위 아래로 절반씩 만들어 붙이는 방식으로 작업을 한다”며 “얼마 전에는 달항아리를 만드는 방식이 통일이라는 개념과 부합해선지 통일부에서 주문을 해간 적도 있다”고 말했다.


영남요의 특징은 현대화된 전기가마를 사용하는 대신 재래방식인 망댕이가마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요에서 사용하는 전기가마는 가마 안의 온도가 일정해서 똑같은 도자기가 생산되지만, 영남요에서는 장작으로 가마의 불을 지피기 때문에 같은 가마 안에서도 위치에 따라 온도가 다르다. 이에 따라 같은 가마에서 나오는 도자기라고 해도 색깔과 모양이 제각각이어서 세계에서 단 하나 뿐인 작품이 생산되는 셈이다.


김정옥 명인은 “길이 25cm, 지름 약 13cm 정도로 뭉친 흙덩어리를 15°정도의 경사로에 5~6칸을 쌓아 만든 가마를 망댕이가마라고 한다”며 “주변에는 작업장, 디딜방아, 땅두멍, 괭 등 일련의 도자기 생산시설을 함께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문경읍 관음리에는 180년 전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망댕이가마가 지금도 남아있다.


김정옥 명인은 “전통방식으로 구워낸 도자기에는 물을 부어 10년을 둬도 썩지 않는다”며 “달항아리는 위아래 부분을 잘 붙이지 않으면 금이 가기 때문에 만드는 공정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남요의 자기들은 국내에서 보다 일본에서 평가를 받고 있다.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렸던 임진왜란 때도 일본은 도공들을 자국으로 끌고 가 오늘날의 도자기 강국이 됐다. 그래선지 요즘도 적지 않은 일본 관광객들이 영남요를 찾고 있다.

 

 

문경의 자기

 

 

김정옥명인

 

 

 

달항아리

  

 

도자기 명가에서 태어난 김정옥 명인은 18세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도자기를 빚었다. 김명인은 “애조에 도자기를 빚을 생각은 없었지만 아버지를 모시다가 일을 돕게 됐고, 20년 넘게 하다 보니 불혹이 넘으면서 장인이라는 호칭까지 얻게 됐다”고 말했다.

 

 


오미자 와이너리 오미나라


문경에 왔다면 꼭 들러봐야 할 곳이 오미자 와인을 제조하는 와이너리 ‘오미나라’다.


이곳을 세운 이종기씨는 1990년 스코틀랜드 수도 헤리웃 와트대학원에서 양조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계각지에서 모인 급우들과 함께하는 파티가 있었는데 주임교수의 제안으로 각기 자기나라의 대표명주를 가져와 시음을 하는 순서가 있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약재 침출주를 준비해가지고 갔는데 주임교수가 "이 술은 허브향도 있지만, 조미료 맛이 지배적인 것 같군"이라고 농담을 했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계의 모든 술이 칭찬을 받았는데 우리나라의 술만 악평을 받은 것이다.


이씨는 “그 순간 세계의 모든 애주가들이 감탄할 만한 명주를 반드시 내 손으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고향 집에 개인 연구소를 만들고, 한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원료로 양조 실험을 했다. 그는 한국에서 조달 가능한 원료들의 양조적성을 비교해 가면서 ‘어떤 와인을 만들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때 오미자가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가 원산인 오미자는 붉은 색조와 상큼한 신맛, 은근한 단맛, 매운맛의 허브향, 그리고 간간한 짠맛까지 지닌 과일로 그가 찾아 헤매던 와인의 원료였다. 2006년 말 그는 27년간 다니던 주류회사를 그만두고 이듬해인 2007년 영남대에 양조학과를 개설, 오미자와인 연구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오미자 생산지 문경에 공장과 연구소도 세웠다. 2010년 말에는 오미자와인 제조 특허를 따냈고, 2011년에는 3년 숙성한 오미로제 스파클링 와인을 완성했다.


오미나라에서 이렇게 생산된 오미로제 스파클링 와인은 지난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만찬주, 2014 ITU전권회의 개막만찬주로 선정되는 등 명성을 얻고 있다.


오미나라에서는 오미자와인의 생산 뿐 아니라 체험코스도 운영하고 있다. 오미나라를 찾으면 오미자와인 제조공정을 견학하고, 포토존에서 사진을 촬영할 수도 있다. 이밖에 숙성된 오미자 와인을 병에 담고, 코르크 막기와 캡을 씌운 뒤 라벨을 붙여 나만의 와인을 만들어 가지고 가는 체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체험코스를 이용할 경우 소요시간은 1시간~1시간 30분 정도이며 오미로제 스틸와인과 스파클링 와인중 한 종을 택일 시음을 할 수 있다. 참가비는 2만5,000원이며 5명이상 이면 체험 프로그램을 신청할 수 있다.

 

 

오미나라 와인

 

출처 화폐와 행복 5+6, 『여행칼럼

글 우현석 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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