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OMSCO는 지금/KOMSCO 사업&기술

서애 류성룡 - 광복 70주년 기념 <요판화+메달> 1차

by 한국조폐공사 2015. 2. 12.







실학의 대가이자 명재상으로 이름난 유성룡(류성룡), 유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유성룡은 김성일과 동문수학했으며, 21세기 때 퇴계 이황에게서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칭찬을 들었습니다. 선조는 유성룡을 일컬어 "바라보기만 하여도 저절로 경의가 생긴다"라고 하였고, 이항복은 "어떤 한 가지 좋은 점만을 꼬집어 말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이원익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정여립 모반 사건 때도 자리를 굳건히 지켰을 뿐 아니라, 동인이었음에도 광국공신()의 녹권을 받았고, 1592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정치가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그의 학문은 체()와 용()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서를 주어 실전에 활용하게 하였습니다.


유성룡(류성룡) 선생의 업적

유성룡은 학문적 업적보다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수습한 경세유로서의 업적이 보다 주목되는 인물입니다. 『징비록』()·『상례고징』()·『신종록』()·『영모록』()·『난후잡록』() 등 그의 저술에도 경세에 관한 내용이 절대적이어서 성리학자로서의 특징을 읽을 수 있는 글은 적은 편입니다. 그러나 이황의 고제()로서 김성일()과 함께 영남학파의 발전에 한 축을 이루는 사상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유성룡은 이황의 문도로서 스승이 확립한 성리학의 기본 관점을 그대로 계승하지만, 사단칠정과 같은 성리설의 문제에 관한 특별한 논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학문과 관련하여 특기할 점은 육왕학()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17세에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 갔다가 『양명집』을 구해 보게 되었는데, 이때의 일이 인연이 되어 유성룡은 평생 양명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상산학과 양명학에 대한 그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이황의 양명학 비판의 연장선에 있지만, 양명학의 근본정신에 대해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양명학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의 수양을 특히 강조하는 그의 학문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리선기후() 및 호발설()을 확고히 지지한다는 점에서 이황의 성리설을 계승하고 있지만, 원대 허형()의 출처관에 대한 평가나『대학』의 격물치지()의 해석에서는 독자적인 견해를 보입니다.[각주:1]

말년인 1598년에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그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습니다. 1605년 풍원부원군에 봉해졌고, 파직된 뒤에는 고향의 옥연서당에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과 『서애집(西)』, 『신종록()』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그가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어의를 보내 치료케 했지만 유성룡은 65세의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회에서 세상을 떠난 유성룡의 집안 살림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는 소식에 수천 명이 그의 빈집이 있는 서울의 마르냇가로 몰려들어 삼베와 돈을 한푼 두푼 모아 장례에 보탰다고 합니다.[각주:2]


서애 류성룡함[西 ] 알고 계시나요?
한국 해군의 이지스(aegis)함으로, 세종대왕함(2007), 율곡이이함(2008)에 이은 세 번째 이지스함입니다. 함명으로 결정된 서애 류성룡 선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로,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자 전시 최고 군직이던 도제찰사(使)를 맡아 군사업무를 총괄하여,[각주:3]충무공 이순신 제독 등 명장 중용을 상신하여 국난을 극복한 뛰어난 재상이자 전략가로 활동하였습니다. 






  1. [네이버 지식백과] 유성룡 (조선 전기 수양론, 2004,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본문으로]
  2. [네이버 지식백과] 서애 유성룡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2012.10.5, 다음생각) [본문으로]
  3. [네이버 지식백과] 서애 류성룡함 [西厓 柳成龍艦]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