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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SCO 이야기/KOMSCO 이모저모

[명작산책]르네상스를 이끌었던 가문 '메디치'와 3대 거장

by 한국조폐공사 2012. 9. 12.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가문 ‘메디치’와 3대 거장

-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 천재들의 경쟁 속에 탄생된 위대한 작품들..

 

 

<다비드 1501~4, 대리석 410cm,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다양한 영역 ․ 분야 ․ 문화 등이 하나로 만나서 기존의 생각을 새롭게 재결합함으로써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바로 ‘메디치 효과 (Medici Effect)'라고 한다.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여러 분야의 예술가, 철학자, 과학자 등을 후원하여 이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서로의 역량이 융합되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르네상스를 일으킨 데서 유래된 말이다.

 

메디치가는 은행업으로 재력을 축적한 중산층의 평민 가문 출신으로 시작하여 피렌체를 통치하기까지에 이른다. 귀족들과의 대립과 견제로 추방되기도 했지만 다시 평민들의 지지를 얻어 복귀하기도 하는데, 귀족들에게 미움을 받으면서도 평민들의 편에 서서 예술가를 후원하며 민심과 예술을 얻을 수 있었던 메디치가를 일으킨 ‘코시모 데 메디치’는 ‘예술가는 존중되어야 하며 예술가를 단순한 장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아래 예술가들에게 아낌없는 후원을 하여 문화, 예술, 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르네상스의 부흥을 이룩하였다.

 

그의 손자인 로렌초 대에 이르러 르네상스는 절정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때 등장하는 이들이 바로 르네상스의 3대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르티’, ‘라파엘로 산치오’이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건축가이며 발명가이고, 생물 ․ 지리학 ․ 수학 ․ 과학 ․ 음악 ․ 철학 ․ 기계학까지 여러 분야에 능통했던 천재 레오나르도는 미술을 과학의 토대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가 사랑하는 그림을 ‘손을 써서하는 비천한 기술’에서 ‘존경받는 직업’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었다.

 

<모나리자, 1503~6, 유채패널화, 77x53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세계에 대한 지치지 않는 호기심과 집요한 관찰력으로 새 영역을 열어 나갔고, 새로운 지식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작한 일을 대부분 끝내지 못한 채 다른 일로 넘어가곤 했는데, 그의 작품 ‘모나리자’도 배경과 인물의 세부가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모나리자가 지은 표정의 미묘함과 대기원근법으로 그려진 배경에서 느껴지는 환상적인 분위기는 미완성이기 때문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스푸마토’기법으로 그려진 눈과 입의 표현으로 볼 때마다 표정이 달라 보이는 모나리자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신비하게 느껴진다. ‘스푸마토’란 ‘연기와 같이 흐릿한’이란 이탈리아 말로 연기와 공기가 섞여 경계가 흐릿해 지는 것처럼 사물과 사물의 경계에서 생기는 윤곽선을 문질러 흐릿하게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윤곽선을 불분명하게 표현하여 빛이 비추는 각도나 빛의 강약에 따라 윤곽선의 위치가 달라져 보이기 때문에, 볼 때마다 모나리자의 표정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시스티나성당 천장화-천지창조, 1508~12, 프레스코, 41.2x13.2m, 로마, 바티칸 궁전>

또 다른 천재, 역사상 최고의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많은 것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림 수업을 받은 지 일 년 만에 좀 더 ‘영웅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했던 조각으로 눈을 돌리고, 메디치가의 후원 속에서 조각과 해부학에 전념하며 인체의 모든 것을 알고자 했다. 그는 조각을 ‘대리석 속에서 잠자고 있는 형상을 대리석으로부터 해방시킨다.’고 생각했다. 피렌체의 수호상으로 제작된 4m가 넘는 크기의 ‘다비드’는 강한 근육질과 굳건한 표정으로 어떤 위험도 이겨낼 수 있는 젊고 강한 청년으로 묘사되어 있다. 3년간을 씻기는 커녕 잘 먹지도 않고 조각에 매달렸던 미켈란젤로는 일어나서 바로 작업하기 위해 신발도 벗지 않고 잠들만큼 열정적으로 제작에 임했다고 한다. 이 조각의 완성 후 큰 명성을 얻은 미켈란젤로는 이미 거장이었던 레오나르도와 맞대결을 할 기회를 갖게 된다. 두 사람이 함께 피렌체 정부의 대회의장을 꾸미는 대규모 벽화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동일한 크기의 화면에 비슷한 주제-앙기아리 전투와 카시나 전투-로 서로 실력을 겨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서로에게 부담감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 아쉽게도 그림의 완성 직전 수많은 습작만을 남겨둔 채 둘의 대결이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렇게 경쟁을 부추기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르네상스 문예부흥을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라이벌 의식’ 덕분에 자신들의 미술을 더욱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라이벌 라파엘로와의 만남은 로마에서 시작된다. 레오나르도가 먼저 다른 주문으로 벽화 일을 포기하고 떠난 후, 미켈란젤로도 교황 율리오 2세의 무덤 기념물 주문으로 인해 로마로 가되 되고, 이곳에서 또 한 번 세기의 대결을 펼쳐지게 된다. 건축가 브리만테의 계략으로 결국 무덤 기념물 계획이 무산되고 대신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미켈란젤로가 천정화를 그리는 바로 옆방인 교황의 집무실 벽화를 라파엘로가 그리게 된 것이다. 처음에 미켈란젤로는 ‘나는 조각가이지 화가가 아니다’라며 2년 동안이나 거절을 하다가 결국 그 일을 맡게 되는데,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화풍을 연구하고 받아들이면서 급성장하는 시골뜨기 청년 라파엘로에게 질 수 없다는 경쟁심과 오기가 그의 능력을 극대화 시켜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풍부한 상상력과 세부를 묘사하는 정확한 솜씨, 그리고 그림에 나타난 장대함은 어느 그림에서도 볼 수 없는 훌륭함이라고 할 수 있다.

 

 

<아테네 학당, 1509~10, 프레스코, 579.5x823.5cm, 로마, 바티칸 궁전>

 

라파엘로의 그림 역시 르네상스 미술의 이상인 조화, 균형, 절제의 미덕을 가장 잘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 받으며, 작품과 함께 화가인 자신도 우아한 아름다움의 화신이었다고 평가 받는다. 라파엘로의 재능은 혁신보다는 종합으로, 플랑드르 풍의 정교한 세부묘사와 단단한 윤곽선, 레오나르도 특유의 구도와 명암법, 미켈란젤로의 영웅적 무게감을 가졌을 뿐 아니라 베나치아 미술의 특징인 빛과 예술의 효과를 모두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을 흡수하여 그만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혁신적이지는 않지만 신선함으로 새로움을 이끌어 냈다.

 

세 명의 천재는 동시대에 출현하여 서로의 경쟁 속에서 위대한 작품을 이끌어 냈으며, 아무리 천재라도 노력과 성실 없이는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며 프랑스와 영국,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르네상스를 퍼뜨리고 현대적 의미의 미술이 탄생하게 되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written by 손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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